파스칼은 '팡세'의 첫머리에서 '기하학적 정신'과 '섬세한 정신'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블레즈 파스칼은 프랑스의 심리학자, 과학자, 발명가, 과학자, 철학자, 작가다. 블레즈 파스칼은 흔히 과학자나 수학자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신학과 철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블레즈 파스칼 주요 저서는 팡세,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있다. 파스칼의 신학적 업적 중 가장 특기할만한 것이 바로 팡세이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팡세는 그가 죽을 때 아직 미완성이었다.
그의 기독교적 변증이 담겨 있는데, 그는 자신을 신학자이자 철학자의 입장으로 두고 저술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저술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몽테뉴와 같은 회의주의자들과 데카르트 같은 합리주의자에 대해 자신의 변론을 펼치며 사상을 전개한다.
팡세라는 단어는 프랑스어에서 '생각, 사색'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팡세'는 논리적인 사고뿐 아니라 감성적인 판단이라는 의미도 있다. 파스칼이 23세일 때, 파스칼의 아버지인 에티엔 파스칼은 사고로 인해 엉덩이뼈를 다쳤다. 이때 기독교 신자였던 접골사 데상 형제가 집에 머물면서 에티엔을 치료했고, 이들의 영향으로 파스칼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파스칼이 결정적으로 기독교 신학에 빠져든 것은 1654년이다. 그는 이때 하늘에서 내려온 목소리를 들었다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글을 썼다.
그 글은 지금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기하학적 정신'이란 정의나 원리를 토대로 사물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정신이다. '섬세한 정신'이란 직관으로 사물 전체를 한눈에 파악하는 정신이다. 파스칼은 대륙 합리론의 시조인 데카르트를 비판한다. 그는 데카르트가 이성을 우위에 두고 사고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인간을 철저하게 기계로 간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블레즈 파스칼은 1623년 6월 19일 프랑스 클레르몽페랑 지방에서 루앙의 세무공무원 에티엔 파스칼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스칼은 어려서부터 수학에 비상한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몸이 허약하였으므로 줄곧 집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 에티엔은 파스칼의 교육에 매우 관심 두었다. 어린 파스칼에게 기성 지식보다 자연현상에 관심 두도록 하였다. 그는 수학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파스칼은 수학에 오히려 흥미를 느꼈고, 가정교사에게 기하학에 관해 지속해서 질문했고, 남은 시간 수학을 공부하곤 하였다.
블레즈 파스칼이 "수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뻔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가 종교상 고찰에 정신을 집중하여 천착하였으므로 27세 때는 수학과 과학 연구를 중단하였기 때문이다. 블레즈 파스칼이 살던 17세기는 유럽에서 기독교의 여러 종류가 생겨나고 서로 논쟁하던 때이다. 3년간 연구를 중단했던 블레즈 파스칼은 수학의 세계로 돌아와 "수삼각형론"을 재작성하였고 유체의 압력을 주제로 하여 여러 가지를 실험하면서 수학상 재능을 재발휘할 때 노련하고 탁월한 도박꾼 슈발리에 드 메레, 본명은 앙투안 공보로부터 어떤 게임에서 점수를 매기다가 중단된 경우 상금을 배분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당시 유능한 수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에게 문의하였었다.
점수분배 문제는 일정한 점수를 따면 그딴 쪽이 상금을 타는 경기에서 한 쪽이 이기고 있는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경기가 중단되는 때 상금을 배분하는 방법이다. 블레즈 파스칼은 당대 또 다른 천재 수학자 페르마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둘은 확률론 기초를 같이 다졌다.
파스칼이 다시 수학에 재능을 꽃피우려는 순간에 마차 사고가 발생했다. 1654년 말 그는 사두마차를 타고 있었는데, 말의 고삐가 풀려 마차가 다리로 돌진했다. 다행히 그의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지만, 이런 행운은 지독한 신도였던 그가 자기 분석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파스칼은 점점 더 신학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그는 유명한 팡세,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등을 저술했고,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파스칼은 1648년 9월 19일, 유명한 “파스칼의 실험”을 수행했다. 그는 친척인 페리에와 함께 수은 기압계를 들고 퓌드돔 산을 올라가 고도에 따른 수은 기둥의 높이 변화를 관찰하고 같은 해 가을 실험 결과를 정리해 논문을 작성했다. 파스칼은 고도가 높아지면 수은 기둥의 높이가 낮아지는 것은 공기가 무게가 있고 진공이 존재한다는 근거라고 주장했다. 수필 형식으로 쓰인 이 책의 구성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세 갈래의 길 첫 번째는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에 대한 내용이다. 파스칼은 인간이 갈대처럼 바스러지기 쉬운 나약한 존재지만, 생각한다는 점에서 갈대와 큰 차이를 보인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약한 존재임에 받아들인 다음에 사색을 통해 약함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극복해야만 비로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물리학에서도 천재성을 발휘했다. 토리첼리의 책을 읽고 기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토리첼리의 실험을 이용해 유체정역학의 문제들을 연구했고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유체정역학의 기초를 닦은 파스칼의 업적은 후세에 인정받아 압력의 SI 단위가 그의 이름을 따라 파스칼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파스칼은 1648년 9월 19일, 유명한 “파스칼의 실험”을 수행했다.
그는 친척인 페리에와 함께 수은 기압계를 들고 퓌드돔 산을 올라가 고도에 따른 수은 기둥의 높이 변화를 관찰하고 같은 해 가을 실험 결과를 정리해 논문을 작성했다. 파스칼은 고도가 높아지면 수은 기둥의 높이가 낮아지는 것은 공기가 무게가 있고 진공이 존재한다는 근거라고 주장했다. 그가 죽은 후 1663년 페리에에 의해 <액체의 평형에 관한 논문집>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논문에는 파스칼의 원리를 비롯한 유체정역학의 중요한 법칙들, ‘진공 안의 진공’ 실험, 파스칼의 실험이 정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