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루소는 <사회 계약론>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통해 기존 사회 질서의 불합리를 비판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장 자크 루소는 스위스 제네바 공화국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사회계약론자이자 공화주의자, 직접민주주의자, 계몽주의 철학자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데 사회생활을 영위하려면 불가피하게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루소에게 의지는 추구하거나 회피하고, 긍정 또는 찬성하거나 부정 또는 반대하려는 마음으로서, 이성, 감정과는 별개로 인간 본성에 존재하는 능력의 하나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언급된 일반의지는 "모든 공동의 힘으로 개인과 각 연합사의 이익을 방어하고 보호하며, 그에 따라 각자는 전체에 결합함에도 오직 자신에게만 복종하여 전처럼 자유롭게 남게 되는 연합 형태"를 추구하려는 의지이다.
이런 의지를 가진 개인이 모여 사회계약행위를 함으로써 국가를 창설한다면 국가 자체는 물론 국가의 모든 권력은 일반의지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 되며, 그 국가는 "개인과 각 연합사의 이익" 즉 "공공선"을 추구하게 됨과 동시에 "전체에 결합"되는 것 외에는 어느 개인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구성원 모두의 "동등한 자유" 즉 평등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계약행위를 하는 당사자 중에는 이전의 국가체제를 고수하거나 또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사적인 개별의지를 가진 사람도 존재하므로, 모든 인민의 의지의 합인 전체의지는 일반의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회계약에 의해 국가가 성립되고 난 뒤에, 의회에서 표출되는 국가의 존립, 정부 구성, 기타 인민의 요구사항에 관한 법, 또는 사안 중에서 어느 것이 "공공선"과 "동등한 자유"에 해당 또는 가까운가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게 된다.
루소는 의회의 투표에 의해 표출된 의견이 가진 공공선과 자유에 관해 넘치는 부분과 모자라는 부분을 가감하고 남은 의견에서 일반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단, 의견을 공유한 의회 구성원들이 파당을 형성하여 개별의지에 불과한 자신들의 의견을 다수득표의견으로 만들어 일반의지로 둔갑시키는 일이 발생하지 않거나 제도적으로 방지되는 상황에서, 의회 구성원 각자가 자기 내면의 빛에 따라 투표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루소는 자유가 억압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먼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국민이 자유를 양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적 자유란 의무와 이성에 따라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모든 구성원이 공감할 수 있는 공통된 '일반의지'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한다. 루소의 사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일반의지는 마치 공자의 사상이 간단히 인으로 상징되어 논란이 끊이지 않듯이 논쟁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루소는 비교적 일관된 자기 철학을 전개하고 있어 이를 이해하기가 어렵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루소는 사상 최초로 인간 평등문제를 실천적으로 파고든 철저한 평등주의자다. 계몽철학자들도 평등을 주장했지만 당위적 차원에서 이고, 사실상 엘리트주의였다.
천재 철학자 칸트조차도 철저한 엘리트주의를 자처했다. 칸트는 루소의 《인간 불평등기원전》을 읽고는 벼락를 맞은 듯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나는 천성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 지식만이 인류의 영광을 이룬다고 믿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대중을 경멸했다. 루소를 읽고는 이런 맹목적 편견이 사라졌다. 나는 인간성에 대한 존경심으로 도덕적 평등주의자가 됐다"가 했다.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 문명사회로 이행하는 것을 곱지 않은 시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저서 인간 불평등기원론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는 인간이 소박하게 자연을 이용함으로써 자연적 자유가 보상되었다. 자연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새로운 평등 사회를 만드는 방법을 제안했다. 루소가 생각하는 정부는 국민이 고용한 일꾼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의 의지를 집행하는 일만 성실하게 수행해 주면 된다. 모든 국민이 만족할 만한 공통 의지를 간추릴 수 있다.
제네바에 우연히 들른 루소는 환대받지 못하고,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발길을 돌려 그곳에서 로마 가톨릭 세례를 받았으며, 장 조세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732년부터 1740년까지 샹베리와 샤르메트에서 바랑 부인 곁에 살면서 음악에 몰두하고, 많은 독서를 하며 다방면에 걸쳐 교양을 쌓는다. 1741년 계몽주의자인 달랑베르, 파리와 디드로에서 만나 친교를 맺었다. 1742년 새로운 악보 표기법을 정리하고, 파리로 가서 그것을 아카데미에서 발표하지만 기대했던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1743년 이 출판된 후 베네치아로 이주하여, 몽테귀 백작의 서기직을 맡지만 1년도 채 못 되어 백작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퇴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의 특색은 18세기적인 사회 윤리를 가장 독창적으로 탐구한 점에 있으며, 근본 사상은 "자연은 인간을 행복·자유·선량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회가 인간을 불행·사악·노예로 몰아넣었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그가 쓴 모든 저작도 이 원리에 기초하여 개인과 사회를 회복하는 방법을 나타낸 것이다. 그의 영향은 정치·교육·철학·문학 전반에 걸쳐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문학적 지위는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자 볼테르와 함께 19세기의 대표적 작가로서, 계몽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루소가 철저한 평등주의자라는 것에 비추어 일반의지는 진리이되 신비적, 초월적 진리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정의고 공공선이 된다. 정의와 선은 당연히 평등이고 평등은 경제적 평등으로 공동체 모두의 이익을 보장해서 공존, 공영하는 공화주의의 근본이념이다. 루소는 사회의 변혁을 도모한 사상가로, 일반의지는 관념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실천을 전제하고 동시에 일반의지는 방향성을 갖는다. 선한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의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의 의지로 읽힐 수는 있으되 반드시 평등 공화주의라는 좌표를 향한, 평등 실현을 위한 합일된 의지 바로 그것이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