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의 신학자 혹은 철학자들은 종교와 철학을 어떻게 타협하고 받아들이고, 생각해야 하는지를 두고 이 물음에 탁월한 타협점을 제시하는 철학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서방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이다. 또한 자연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이며 서방교회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토마스 학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교회 학자 33명 중 하나이며, 현재 로마가톨릭교회는 그를 신학자요 박사로 존경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딴 학교나 연구소 등이 많이 있다.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인물로 널리 알려진 그는 그리스도교와 철학을 융합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기독교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여 스콜라 철학을 대성한 중세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할 때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완성한다"는 태도를 갖고 은총과 자연, 신앙과 이성 사이에 조화로운 통일을 부여했다. 그의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전 자연은 신이 창조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고상한 부분이므로 인간이 자연 전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신의 존재를 추론(推論)하는 것은 신을 찬미하는 길인 것이다. 스콜라 철학이란 스콜라, 즉 중세 신학교에서 가르친 그리스도교 철학을 일컫는 말이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유럽은 이슬람 문화와 접촉했다. 과거에 이슬람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발전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만나 관심을 갖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때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개념을 이용해 그리스도교 신학을 체계적으로 발전했다.
신의 존재 증명에는 본체론적 증명을 피하고, 경험에 의해 주어진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제1 원인인 5가지 길을 사용한다. 악의 문제는 선의 결여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다음에 인격의 단일성을 믿는 그는 영혼의 유일 형상성에 바탕을 둔 인간학을 전재한다. 이성적 동물로서 영과 육의 합성체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영혼에는 의지 작용과 이성 작용이 있으며, 영혼은 이성적 인식 작용의 원리일 뿐 아니라 동물적·식물적 생명 원리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인식론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인데 이성은 감각이 주는 내용으로부터 추상 작용에 의해 대상의 본질 개념을 형성한다고 주장하고 수동지성과 능동 지성을 구별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리스도교 교의에 훌륭하게 접목함으로써 종교와 철학을 서로 모순되지 않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도덕론에서는 모든 도덕은 신을 향하는 이성과 피조물의 운동이라고 파악하므로 종국적인 목표는 피안에서의 신 직관한다. 여기에 인도하는 수단으로서 윤리적 행위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 도덕률을 영원 법의 반영이라 보고 초자연적 신에 근거하여 신을 향하는 목적론적 존재론의 체계 안에서 파악한다. 따라서 초월적인 것이 동시에 자연의 이성의 소리가 된다. 이성에 복종하는 습성으로서의 덕에는 세 윤리적으로 사려의 덕을 추가하고, 그 위에 은총에 의한 신학적 덕을 추가한다. 그중에도 사랑이 여러 덕의 형상으로서 인격의 최종적 완성을 이루게 한다고 주장한다.
소년기에는 그의 아버지는 1230/1231년경 막내아들 토마스를 성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냈다. 여기서 토마스는 수도사 수업받는다. 전기작가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몬테 카시노 대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까닭이 그가 미래의 수도원장으로 성장하길 바랐던 토마스 부모들의 기원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239년경 토마스는 당시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수도사가 되는 수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친다. 그래서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나온 후 당시 프레데리쿠스 2세의 후원으로 성장일로 있던 나폴리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나폴리 대학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의 7개의 필수 학문인 음악, 천문학, 기하학, 문법, 수사학, 논리학, 대수학, 기하학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리스도교 교의에 훌륭하게 접목함으로써 종교와 철학을 서로 모순되지 않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존재론은 신학 전체의 특징을 이루는 것으로 실재적 색채가 강하다. 신과 피조물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는 '존재의 유비'를 사용하여 유비와 참여의 개념에 의해 동일성 안에 차별을 가진 존재의 파악을 가능케 하여 범신론과 불가지론의 위험을 피하였다. 본질 구조의 규정 원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현실태와 가능태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더욱이 아비체나에게서 발견한 '본질과 존재'의 구별을 이용, 그의 독자적 원리를 전개하고, 본질과 존재가 일치하는 신 존재의 필연성,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관념을 확립하였다.
신의 존재를 설명하기는 더욱 어렵다. 또한 종교를 믿지 않아도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서 조금이라도 힌트를 주는 고마운 철학 개념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의 유추'라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생각한 신이란, 존재론의 으뜸이면 기초가 되는 절대적인 개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지상의 존재인 인간과 하늘의 존재인 신을 대비해 설명한 사람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대학 사상 처음으로 두차례나 교수직을 역임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하지만 1268년으로부터 1272년까지 4년간의 파리 체재 기간은 겉으로 드러난 영광조차 느낄 시간도 없는 거론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또한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해야 하는 교수로서, 그리고 성직자로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느꼈을 책임감과 압박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그런 압박감은 종종 이 시기에 쓰인 논박서, 예컨대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와 같은 저서에 자신과 대립하고 있는 상대에 대해 예의 냉정함과 침착함을 잊고 노기까지 드러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