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랭프 드 구주의 전기작가 올리비아 블랑에 따르면,
1773년에 구주는 부유한 남자인 자크 비에트릭스 드 로지에르(Jacques Biétrix de Rozières)를 만나
이후 긴 연애관계를 맺어오다 프랑스 대혁명때 결별했다.
올랭프 드 구주(Olympe de Gouges)는 프랑스의 시민운동가이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혁신적인 주장을 하였다.
그는 연인의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세태를 꼬집는 소설과 희극 등을 발표하였는데,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사투리를 썼기 때문에
철자가 엉망이어서 집필은 대필작가에게 맡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주는 과학적 합리주의를 동원하고, 비평적인 조사를 하며,
기성의 전통적인 도덕관념과 제도에 비판적이었던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녀가 쓴 글에서 그 흔적이 남아있다. 남편과 아내의 부는 마땅히 동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
그들이 어떤 사회 계층 출신이든지 재산은 그 둘 모두와 자녀들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계약의 내용이다. 만약 남편과 아내가 이혼할 시에는,
그들이 가졌던 소유지는 똑같이 나눠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구주는 이러한 것을 "혼인 계약"이라고 이름 붙였다.
구주는 또한 빈곤 계층의 남성과 결혼한 여성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부유 계층의
가족에게 입양 보내는 일을 허가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1791년,
그녀는 "소셜 클럽(Social Club)" 혹은
"진실한 친구들이 모이는 사회(Society of the Friends of Truth)"로 불리던 한 모임의 멤버가 되었다.
이 곳은 여성의 평등권과 법적 권리 향상을 위해 공통의 목표를 상정한 곳이었다.
그들은 종종 저명한 여권 옹호론자였던 소피 드 콩도르세(Sophie de Condorcet)의 집에서 회동을 가졌다.
바로 이곳이 구주가 최초로 그녀의 유명한 연설을 한 장소이다.
"여성들에게도 교수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또한 여성들은 연단에 올라설 수 있는 권리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Woman and the Female Citizen)'의 마지막 한 구절에서,
구주는 여성들을 여전히 자신들보다 열등한 존재로만 여기는 남자들을 지목하며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 국회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Woman and the Female Citizen)'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이는 국회가 가진 무관심의 결과였다.
"여자의 영혼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평가하기 위한 가장 쉬워빠진 방법이 여기 있다.
일단 그 여자들에게 남자들이 하는 모든 활동을 허가하면 된다.
만약 어떤 남자가 이것에 저항한다면 법의 지혜를 빌어 그가 여성들과 함께 재산을 공유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구주는 왕정제 폐지를 반대했다고 한다.
구주는 국왕을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로 그리는 한편, 그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는 고결한 여성으로 그렸다.
또한 왕비가 프랑스의 재정위기가 지속될 동안 그녀의 국민들의 복지를 위해,
자신이 누려온 라이프스타일을 폐기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목표가 국왕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형태의 정부, 공화국을 세우려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랭프 드 구주는 왕정제의 유지를 원했다. 파리에 살고있던 다수의 남자와
여자들은 마리 앙투와네트 왕비가 자신들이 겪어야했던 비탄의 원흉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구주는 왕비를 옹호했으며 자신의 선언문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Woman and the Female Citizen)'의
머리말을 왕비에게 헌정, 그 소제목을 "왕비에게"로 붙였다.
그 내용에는 프랑스 대혁명의 초창기부터 구주가 여왕을 옹호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혁명이 지속될 수록 구주는 점점더 격렬한 저술활동을 이어나갔다.
종국에 구주 본인은 그녀가 붙인 전단지,
'세개의 주전자 혹은 조국의 구원 by 공기화된
여행자(The Three Urns, or the Salvation of the Fatherland, by an Aerial Traveller)'의
내용이 죄목이 되어 체포당했다.
그녀의 저작은 세 가지 형태의 예비 정부에 관한 국민투표를 요구한다.
그 세가지 중 첫 번째 형태는 통합된 공화국,
두 번째 형태는 연방정부, 세 번째 형태는 입헌군주제였다.
구주는 감옥에서 세 달을 보내며 변호사 없이 그녀 스스로를 변호하고자 했다.
이것은 구주가 유달리 자신을 변호하는데 있어서 유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재판장이 그녀의 변호사 선임 권리를 허락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그 비열한 재판장이 구주가 자신의 저작들에서도 그러했듯,
자신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기질과 성정을 자연스레 묻어나게 만들고자 의도했던 일인듯 하다.
구주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사망한 해인 1784년부터 그녀는 대중적인 식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고,
그로부터 9년 간 저작활동을 지속했다. 40점의 에쎄이, 선언문들, 문학 관련 논문들,
정치 선전용 팜플릿들, 사회의식 고양 연극이 그녀가 쓴 작품들이었다.
1784년에 구주는 반(反) 노예제의 목소리를 내는
연극인 '자모르와 미르자(Zamore and Mirza)'의 극본을 썼다.
몇가지 이유로, 1789년까지 그 연극은 공연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구주는 그 작품을 '흑인에 대한 고찰(Reflections on the negroes)'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을 강행하였다.
흑인 노예제에 반대하는 희곡이나 여성의 이혼권을 옹호하는 글을 통해
약간의 명성을 얻었던 올랭프 드 구주는 희망과 기쁨으로 프랑스 혁명을 반겼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에서 내건 평등의 권리가 여성까지 확대되지 않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껴 <인권선언문>에 빗대어 <여성권선언문>을 썼고,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한 루소에 빗대어
성적 평등에 바탕 둔 결혼을 주장한 <사회계약론>을 썼다.
올랭프 드 구주는 1791년에,
그녀의 유명 저서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Woman and the Female Citizen)'을
프랑스 헌법이 제정된 직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평등한 참정권을 보장하고 있는 프랑스 헌법이 여성의 참정권을 다루거나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