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스틀리는 과학은 신학에 없으면 안 되는 요소라고 생각하였으며 계몽적 합리주의와
기독교의 융합을 생각하였다. 그의 철학적 저작에서는 유물론, 결정론, 유신론의
융합을 시도하여 그 결과물을 "대담하고 독창적인(audacious and original)"이라고 칭하였으며,
자연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으로 인류의 진보가 촉진되어 기독교적 천년왕국이 도래한다고 믿었다.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여 종교적 관용과 비국교도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
잉글랜드의 유니테리언주의(단일신론주의)의 확립에 관여했다.
주요 과학적 업적으로는 탄산수의 발명, 전기에 대한 연구,
여러 기체(암모니아, 염화수소, 아산화질소, 이산화 황)의 발견 등이 있지만,
최대의 공적은 "탈 플로지스톤 공기" 즉 산소의 명명이다.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는
영국의 화학자, 신학자, 교육학자, 성직자, 정치학자,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er)이다.
그는 자유주의 정치학, 종교, 실험 과학 등 다방면에 기여했다.
프리스틀리는 교육학에도 큰 공헌을 하였으며 영문법에 관한 중요한 저작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역사에 관한 책도 집필하여 연표를 기재해 후세에 영향을 주었다.
1758년 프리스틀리는 체셔 주의 낸 트위치에 있는 교회로 옮겨갔다.
당시 낸 트위치에는 두 개의 학교가 있었는데, 모두 비국교도에게 입학이 허용되지 않은 데다가
교육 과정 역시 제한되어 있었다.
이에 프리스틀리는 직접 새로운 학교를 세워 1761년 워링턴으로 떠날 때까지 3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교에서 그는 라틴어와 수학 등을 가르쳤고 공기 펌프와 같은
간단한 자연철학의 실험기구를 소개하기도 했다.
낸 트위치에서 한 강의가 좋은 평을 받아 1761년 프리스틀리는 랭커셔주의 워링턴에 있는
워링턴 아카데미의 문학 강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1762년에는 워링턴의 비국교도 파 목사가 되었으며,
같은 해 제철업자인 아이 작 윌킨슨의 외동딸인 18살의 매 리 윌킨슨과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는 한 명의 딸과 세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프리스틀리는 워링턴 아카데미에서 문학 강사로 일했다.
프리스틀리는 워링턴에서 거주할 때부터 과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766년 프리스틀리는 전기에 대한 연구로 인하여 왕립 학회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또한 1767년 그는 당시에 알려진 전기에 대한 지식과 실험에 대한 책인
《전기의 역사와 현 단계》(The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Electricity)를 출간했다.
그 밖에도 속이 빈 구(求)의 내부는 전하를 띠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기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역제곱 법칙을 예측하였고,
숯에 전기가 통한다는 것과 전기와 화학 반응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화학에도 관심을 가져 연소와 호흡의 유사성에 대하여 연구했다.
리즈에서 프리스틀리는 삼위일체와 예수의
선재성(先在性, 성자인 예수는 천지창조 전부터 성부와 같이 존재했다는 교리) 등을 완전히 부정하였고,
기독교 교리와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신학 교육에 대한 책인 《자연과 계시 종교의 원리》(Institutes of Natural and Revealed Religion)를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1772년에 1권이 출판되었고 마지막 3권은 1774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책에서 자연 종교, 계시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논거, 계시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실 등을 논했다.
프리스틀리는 리즈에서 ‘여러 종류의 공기’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일산화이질소도 발견하였고,
헨리 캐번디시가 1766년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제출한 논문을 토대로 실험하다가
염화수소 기체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수많은 실험 기구를 고안했다.
이러한 기체에 관련된 연구는 이후
칸 거주 시절에 출판된 《여러 종류의 기체에 관한 실험과 관찰》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different Kinds of Air, 1774~86년)에 저술되었다.
프리스틀리는 기체를 다루는 실험에 대한 글을 《철학회보》에 기고하였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관심을 끌었고,
라부아지에는 추가적인 연구를 통하여 프리스틀리의 실험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제공했다.
프리스틀리는 워링턴에서와 마찬가지로 전기를 계속 연구하였으며, 광학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
그는 1772년 《시각과 빛, 색상과 관련한 발견의 현상(現狀) 역사》
(The History of the Present State of the Discoveries Relating to Vision, Light and Colour)를 출판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서 프리스틀리는 기체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다.
1772년 12월 셸번 백작이자 나중에 렌즈다운 후작이 된
윌리엄 피츠 모리스 페 티가 프리스틀리에게 자신의 사서와 문학 동료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고,
프리스틀리는 이를 승낙했다.
1773년 7월 프리스틀리는 윌트셔주의 칸에 정착했다.
1774년 8월 1일, 프리스틀리는 적색 산화수은을 렌즈를 이용하여 태양열로 가열하여 산소를 얻어내었다.
라부아지에는 계속된 실험으로 플로지스톤설의 오류에 대해서 지적해 나갔고,
결국 플로지스톤설은 라부아지에의 산소설로 대체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프리스틀리의 산소 발견은 라부아지에가 플로지스톤설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프리스틀리는 플로지스톤설을 끝까지 신봉했다.
프리스틀리는 동물과 식물, 공기의 연관 관계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그 결과 빛이 식물의 생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식물이 산소를 발생시킨다는 것도 알아냈다.
이것은 훗날 얀 잉엔하우스와 장 제네바어가 광합성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