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트먼의 부모 월터와 루이자는 가난한 농부이자 퀘이커 교도였으며,
월트는 9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7명의 아들 중 세 명의 이름을 미국 지도자의
이름(조지 워싱턴, 앤드루 잭슨, 토머스 제퍼슨)을 따서 지었다. 장남 제시와 다른 무명의 아들은 요절했고,
여섯번째 아들이자 막내는 에드워드라고 이름 지었다.
월터 휘트먼(Walter Whitman)은 미국의 시인, 수필가, 기자였다.
초월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인물의 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에는 두 양상이 모두 흔적으로 남아있다. [스타]에 있는 동안,
휘트먼은 지역 도서관에 자주 들러서 거리의 변론회에 들어가 극장에 발길을 옮길 수 있게 된다.
휘트먼은 [풀잎] 초판을 자비로 795부를 발간하였다.
휘트먼이 진정 쓰고자 했던 것은 성경의 운율을 이용한 자유시 형식의 미국적인 서사시였다.
1855년 6월 말, 휘트먼은 [풀잎](Leaves of Grass)의 초판을 형제들에게 보였고,
동생 조지는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언급했다.
[풀잎]은 초판 발행 후 몇 개월의 사이에 부적절한 성적 표현으로 주목받았다.
이에 따라 당시 인쇄가 끝나고, 제본되고 있던 제2판의 출판을 출판사가 거부하는 사태도 발생했지만,
결국 20편의 시를 새롭게 추가한 제2판이 1856년 8월에 발표되었다. 1860년과 1867년에 개정판,
재판을 거듭하였고 휘트먼의 생애를 통해서 몇 차례 지속적인 개정을 했다.
블론슨 앨콧(Bronson Alcott)이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등
일부 저명한 작가는 일부러 휘트먼을 방문할 만큼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하였다.
풀잎은 랠프 왈도 에머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에머슨은 휘트먼에게 다섯 페이지에 이르는 칭찬의 편지를 써주었고,
또한 친구들에게도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에머슨의 평가의 덕분에 [풀잎] 초판이 널리 읽혀 상당한 관심을 얻었지만,
동시에 그 외설스러운 묘사에 대한 비판도 받게 되었다. 남북 전쟁이 시작될 무렵,
휘트먼은 북부군을 고무하는 애국 시 [두드려라! 두드려라! 북을!](Beat! Beat! Drums!)를 발표하였다.
휘트먼의 동생 조지는 유니온(북부군) 군에 입대하여 월트에게 최전선의 생생한 모습을 자세하게 적은 편지를 보냈다.
1862년 12월 16일, [뉴욕 트리뷴] 지에 게재된 전사자,
전상자 명부에서 중위 G. W. 피트 모어(First Lieutenant G. W. Whitmore)의
명단을 확인한 휘트먼은 동생 조지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즉각 남부로 향했다.
휘트먼은 워싱턴 D.C에서 친구 찰리 엘 드릿 지의 도움으로 육군 회계관 사무국에서 시간급의 일을 하였고,
나머지 시간은 육군 병원에서 지원 간호사로서 일하게 된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1863년 뉴욕의 한 신문에 발표한 [위대한 환자군](The Great Army of the Sick) 및
12년 후에 발표한 [전쟁의 회상] (Memoranda During the War)에 정리하고 있다.
당시 그는 에머슨을 의지해 정부에서 일자리를 얻으려 하였다.
그는 시인이자, 사진작가이며, 또한 [세터 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 편집자였다.
오코너는 휘트먼을 위해서 내무부 장관 윌리엄 토드 오토에 편지를 써 준 것이다.
휘트먼은 1865년 1월 24일에 근무를 시작하여, 1200달러의 연봉을 받게 된다.
1개월 후 2월 24일, 조지가 포로에게서 풀려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일시 휴가를 받게 된다.
5월 1일에는 약간 더 높은 직위로 승진하게 되었으며, [드럼 텝스](Drum-Taps)를 발표하게 된다.
법무부 장관 사무국에서의 휘트먼의 업무 중 하나는 대통령 특사를 위해 남부군 병사들을 심문하는 일이었다.
후에 휘트먼은 "그들 중에는 정말로 재미있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평범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1866년 8월, [풀잎]의 새로운 판을 준비하기 위해 1개월의 휴가를 얻었지만,
출판사를 쉽게 찾기 힘들었고, 1868년 2월,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에 의해,
영국에서 [월트 휘트먼 시선](Poems of Walt Whitman)이 간행되게 된다.
간행을 즈음하여 몇 개의 수정 요청이 있었고, 휘트먼도 마지못해 승낙하였다.
이 시집은 당시 인기가 높았던 앤 길크리스트의 추천을 받았으며, 영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1871년에는 [풀잎]의 새로운 판이 다시 간행되었다. 휘트먼의 국제적 명성은 높아지고 있었지만,
본인은 1872년 1월까지 법무부 장관 사무국에 근무하였다.
1872년은 관절염에 시달리는 80세 모친을 돌보는데 보냈고,
이 해는 여행하면서 6월 26일에는 다트머스 대학에 초대되어 학위 수여식에서 강연했다.
휘트먼은 《풀잎》 1855년 판 서론에서
"시인의 증거는 시인이 국가에 헌신하는 만큼의 깊은 애정을 가지고 국가가 그를 포옹해 주는가"라고 주장을 하였다.
휘트먼은 시인과 사회 사이에는 빼놓을 수 없는 공생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내 노래](Song of Myself)에서 저능적인 일인칭의 이야기를 이용하여 특히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서사시로 뛰어난 영웅을 등장시키는
전통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등장시킨다.
[풀잎]은 또한 당시 미국에서 진행하고 있던 도시화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자유시의 제일인자이자 창시자로 불렸으며, 서민의 희망·감회를 자유로운 수법으로 솔직히 노래하였다.
그 밖에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미국의 독특한 문학을 주장한 (민주주의 전망)은
미국 물질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인격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다.
휘트먼은 미합중국에서 노예제도 유지를 반대하는 [윌못 조항](Wilmot Proviso)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론자(어볼리셔니즘)는 아니고, 이 운동에는 이익보다 해가 많다고 보고 있었다.
1846년 그는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은 실제로는 그 "극단주의와 전횡적인 태도를 위해서,
목적의 달성을 늦추고 있다"라고 썼다. 그의 주된 주장은 폐지론자의 방법은 민주적인 절차를 저해하며,
남부군의 거절과 마찬가지로 국가 전체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