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의 의견과는 대조적으로, 텐이 파리에서 사사한 새로운 철학 교사들은
당시 널리 보급된 절충주의 철학 이론을 지니고 있었다.
텐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중산층 집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이 폴 리트 아돌프 텐(Hippolyte Adolphe Taine)는 프랑스의 철학자, 사상가, 비평가, 역사가다.
1828년 4월 21일 출생하였고, 1893년 3월 5일에 타계하였다.
19세기 프랑스 실증주의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상가의 한 사람이고, 인간성 연구에 과학적 방법을 가지고 접근했다.
고급학위 심사위원들은 학계에서 얼마간 의혹을 불러일으키면서 1851년에 텐의 논문을 불합격 처리하였다.
그 후에 텐은 느베르와 푸아티에에서 잠시 교사 생활을 했고, 1852년 휴가원을 냈다.
파리로 돌아온 텐은 두 편의 문학박사 학위 논문 준비에 전념했다.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적 방법을 응용해서 과학적으로 문학을 연구했다.
환경, 인종, 시대의 세 요소를 확립하였다.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콜 노르말)에서 공부했다.
1848년 예비 학위를 취득하고 가장 큰 관심 분야의 하나인 철학에서 고급학위를 따려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 텐은 이미 이단적인 사상을 품고 있었다. 15세 때 이미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텐은 1853년 5월 박사학위를 얻고, 리비우스에 관한
논문 [티투스 리비우스론 Essai Sur Tite-Live] (1856) 집필을 시작했다.
이 논문은 텐의 철학적 의견이 더욱 비판받게 될 빌미를 마련했지만,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상을 받았다.
청년 특유의 합리주의적 태도로 인해서, 모든 지식은 감각기관에 의한
경험, 관찰, 및 통제된 실험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찬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은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에게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텐은 생명과 우주의 원인을 총체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사명 적 열의를 품게 되었다.
[영국 문학사]의 서문에서 텐은 자신의, 문학과 문화사 연구 방법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문학비평에 대한 자신의 과학적인 태도를 이해시키기 위해 기본 교재를 소개했다.
텐은 어떤 시대와 사회의 문화유산에도 동일한 원 인력이 잠재해 있다고 주장했다.
텐의 관심은 문학 자체보다 역사적 원인 작용과 심리학에 있다는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텐 자신은 비평가로서의 재능이 상당했지만, 텐의 방법은,
추종자들이 비평적 판단을 희생하면서까지 전기와 문학사에 집착하게 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유행하던 빅토르 쿠쟁 일파의 절충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반론이자,
후반부에서 자신의 실증주의적 지식론을 명쾌히 설명한
[19세기의 프랑스 철학자들 Les Philosophes français du XlX siècle] (1857),
이것과 첫번째 [비평과 역사 평론 Essais de critique et d'histoire](1858),
[영국 문학사 Histoire de la littérature anglaise](4권, 1863~64) 등이 바로 그 책이다.
1860년대 내내 텐은 활발하게 연구와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누구든지 문학작품을 검토해보면 작가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고,
작가의 생애와 성격을 면밀히 조사해 이를 보충하면 작품의 방향을 결정짓는 지배적인 특성을 알 수 있다.
거꾸로, 이 지배적인 특성은 작가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격과
그의 사회적·정치적·지리적 배경 및 그가 집필할 당시의 역사적 상황,
즉 환경, 종족, 시대의 중요한 결정 인자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텐의 주장이다.
파리에서 했던 생활을 소재로 삼아
[파리 비망록:프레데리크 토마 그랭도르주 씨의 생애와 의견
Notes sur Paris:Vie et opinions de M. Frédéric-Thomas Graindorge](1867)을 집필했는데,
이것은 텐의 책 가운데 가장 일상적이고 재미있는 내용을 담은 책으로 알려졌다.
교수직으로 안정된 기반을 얻은 텐은 지속적으로 과학적인 연구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1860년대 후반에는 활기찬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텐은 2번째 평론집인 [비평과 역사평론 2집 Nouveaux essais de critique et d'histoire](1865)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스탕달, 발자크, 라신(텐은 스탕달의 심리적 통찰력에 처음 감탄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에
관한 통찰력 있는 글들이 들어 있다.
텐의 [지성론]은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이지만 당시에는
실험, 원인 탐구, 병력 검토, 성격의 생리적 기초를 강조해 가지고 조사방법을 수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텐의 사상에 대한 비판을 격화시켰다.
텐의 반대자들은 텐이 순전히 결정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인간관을 지니고 있다며 격렬히 비난했다.
텐 스스로는 유물론을 거부하며 자기가 알기로는 결정론과 도덕적 책임은 양립할 수 있다며 반론을 폈지만,
반대파의 비난이 근거가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지성론]은 실증주의와 헤겔의 관념론을 융합해 과학적 형이상학을 위한
방법을 제시하려던 텐의 오랜 노력을 발전시켰다.
그러한 형이상학을 통해 생명 자체의 궁극적인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텐은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문예 비평가,
역사가로서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명성을 얻었고 큰 영향을 끼쳤다.
과학숭배사상인 19세기 프랑스 실증주의에서 가장 존중받는 지성인의 한 사람인 것이다.
텐은 관심사를 대대적으로 바꾼 결과,
이 관심이 과학적 객관주의를 선언한(그러나 사실과 해석의 신뢰성은 계속 문제가 되었음)
기념비적인 역사분석서인 걸작 [현대 프랑스의 기원 Les Origines de la France contemporaine]을 탄생시켰다.
이 저서는 프랑스의 1차적인 결함이 앙시앵 레짐(구체제)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혁명으로 강화된 과도한 중앙집권화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있으며,
그 점에 관해 에드먼드 버크의 냉담한 의견에 공감하고 그 의견을 전개하고 있다.
제1권인 [앙시앵 레짐 L'Ancien Régime]이 1876년에 나왔고 뒤이어 혁명에 관한 책 3권이 나왔다(1878~85).
1878년에 텐은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뽑혔다. 텐은 파리를 떠나서 보내는 시간이 갈수록 많아졌다.
1883년 이후에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안시의 망통생베르나르에 있는 호반의 집에서,
항상 사랑하던 평화로운 자연에 파묻혀 가족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살면서 일했다.
그러나 [레짐 모데른 Le Régime moderne] 1권만이 텐의 생전에 출판되었고(1891),
제2권은 1893년 11월에 출간되었다. 1899년 전작으로 재발간되었다.
텐의 사후에 나온 책으로는 [비평과 역사 평론 3집](1894)과
1861년경에 쓴 미완의 자전적·심리학적인 소설 [에티엔 메랑 Étienne Mayran](191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