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킨의 서술 방식과 문학 형식 역시 다양한데,
그는 수필과 논문, 시와 강의, 여행안내서와 설명서, 편지와 동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글을 썼다.
그는 바위, 식물, 새, 풍경과 건축물 그림과 섬세한 스케치, 장식품 등을 만들기까지 했다.
존 제임스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스코틀랜드 글렌러스에서 태어난 어머니와
잉글랜드 하트퍼드셔주에서 태어난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서 성장했다.
러스킨의 예술 관련 저술의 특징이라 볼 수 있는 정교한 문체는 시간이 흘러
그의 사상을 더 효과적으로 다루게 할 간결한 언어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저술 전반에 걸쳐 그는 자연, 예술과 사회의 연관을 강조한다.
존 러스킨(John Ruskin)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중요한 예술 평론자이자 후원자,
소묘 화가, 수채화가, 저명한 사회운동가이자 독지가이다.
그는 지질학부터 신화, 교육, 건축, 조류학, 문학과 경제학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썼다.
존 제임스는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고, 런던에서 변호사의 수습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러스킨의 유년 시절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비되는 영향과 함께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부모 모두 그에게 매우 의욕적이었다.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감소하던 시기를 지나,
러스킨의 명성은 그에 관한 수많은 학술 연구들이 출판되던 1960년대부터 꾸준히 증대해왔다.
오늘날, 러스킨의 사상은 생태주의와 지속가능성, 공예에 대한 관심과 함께 크게 인정받고 있다.
러스킨은 어린 시절 다닌 영광스러웠던 광범위한 여행 경험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러스킨은 가족 여행으로 호수 지방
(그의 첫 장시, 이테리아드는 1830년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으로 놀러 가기도 하고,
스코틀랜드 퍼스에 있는 친척 집에도 갔었다. 일생 품은 알프스에 대한 사랑을 러스킨은 이 시절부터 키워왔으며,
1835년 그의 후기 작품 태반의 상징과 주제에 영향을 주게 될 '도시들의 낙원', 베네치아를 처음으로 방문한다.
러스킨은 지질학자이자 자연 신학자이던 윌리엄 버클런드와 친해졌다.
동년배 학부생 중 그의 가장 소중한 친구들로는 찰스 토머스 뉴턴과 헨리 어클런드가 있었다.
러스킨은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다음 해 1월에 클라이스트 처치로 칼리지를 정한다.
1839년 러스킨은 세 차례 시도 끝에 시 부분에서 영광스러운
뉴디게이트 상을 받으며 (아서 휴 클 루프는 2위였다) 큰 성공을 거머쥔다.
그는 수상식에서 명예 학위를 받은 윌리엄 워즈워스를 만난다. 러스킨이 근대 작가론을 쓰기 시작하기 전,
러스킨의 아버지는 새뮤얼 프라우드와 터너 등의 수채화 작품들을 모았었다.
두 화가 모두 헌 힐과 덴마크 힐 163번지(1947년 철거됨)의 러스킨네로 가끔 가던 손님들이었다.
덴마크 힐은 1842년에 러스킨 가족이 헌 힐에서 이사 간 곳이다.
1845년 26세의 나이로 러스킨은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으로 그는 프랑스,
스위스와 특히 이탈리아의 중세 건축과 예술을 공부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제목 ‘건축의 칠등’은 러스킨이 모든 건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적인 것으로
여긴 희생, 진실, 힘, 미, 삶, 기억, 복종이라는 7가지의 도덕 범주들을 뜻한다.
7가지 모두 주제로서 책 내에서 여러 번 언급된다.
자연의 우아한 모습들을 묘사하겠다던 라파엘 전파의
'자연주의' – "오직 자연만을 그리는 것" –이라는 헌신 선언은 러스킨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근대 화가론] 4부에서 그는 풍경화의 측면에서, 또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한 지질의 도덕적,
영혼적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알프스의 지리학을 소개한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산의 영광"과 "산의 음울"을 대조하며 러스킨의 사회 분석 초기의 예시를 보여준다.
최근 학자들은 러스킨이 터너의 성애 그림을 파괴하는 데에 공모했다고 전처럼 여기지는 않지만,
터너 유증 품에 관한 그의 저서를 볼 때, 성애에 관련된 그림이 터너에 대한
러스킨의 태도가 바뀌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러스킨은 1871년 그의 51번째 생일날 셸더니언 극장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청중에게 첫 강연을 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어느 나라의 예술이건 그것은 그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인 미덕들을 설명해준다”라고 말했다.
세실 로즈가 강연이 제국주의 영국을 바라보는 로즈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해준다고 생각하며,
강연에서 손수 길게 메모한 것을 소중히 간직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러스킨의 마지막 대작은 자신의 자서전[프라에테리타] (1885년~1889년) ('옛날 것들'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 작품은 매우 개인적이고, 선별적이고,
맵시 있는 문체를 썼으나 본인의 삶의 측면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미완성이다.
이 작품의 서문은 헌 힐에 위치한 그의 어린 시절 유치원에서 쓰였다.
러스킨의 영향은 전 세계적으로 뻗어나갔다. 레프 톨스토이는 러스킨을 두고 “영국과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전 세계와 모든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이 중 하나”라고 표현했으며,
러스킨의 사상을 러시아어로 보여주며 그를 엄청나게 인용했다.
러스킨의 작품은 앞서 언급한 언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일본어) 이외에도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헝가리어, 폴란드어, 루마니아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네덜란드어, 체코어, 중국어, 웨일스어, 인도의 여러 지방 언어들과 에스페란토,
키쿠 유어와 같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러스킨에 감탄한 것을 넘어,
그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까지 했다.
프루스트는 러스킨은 [참깨와 백합]과 [아미앵의 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
러스킨은 프루스트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 “프루스트의 예언자”라고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