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생일인 10월 2일은 인도에서 국경일인 '간디 자얀티'로,
전 세계적으로는 '국제 비폭력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간디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인도의 아버지'라고 여겨지고, 보통 바 푸(아버지의 사랑)라고 불렸다.
모 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인도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로,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시인인 타고르가 지어준 이름이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수상으로 부임한 라지코트로 이사했다. 7살 때 이미 그는 약혼했었지만,
약혼녀들이 모두 차례로 죽어, 세 번째 약혼녀인 상인 집안의 딸인 카스 투르 바이 마칸 지와 13세에 결혼한다.
간디는 아내와 그 뒤 방탕한 생활을 버리고 힌두교의 교리를 충실히 지키며 성욕을 자제하기도 했다.
영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인도의 영국 식민지 기간(1859~1948) 중
대부분을 영국으로부터의 인도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부모에게서 인도의 전통 종교 중 하나인 자이나교의 교육을 받으며,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수상으로 부임한 라지코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배움은 없었으나 아들의 말을 믿어주고 배려하는 분이었으며,
어머니는 힌두교의 교리와 전통을 성실하게 지키는 신실한 힌두교 신자였다.
1890년 영국 런던 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한 그는 이후 1916년 영국 런던 대학교 법학과에서 명예 학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반영 인도 독립운동과 무료 변호,
사티아그라하 등 무저항 비폭력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간디에게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한 성격과 성실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간디는 청소년 시기에 방황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따뜻하게 감싸주심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레 상처를 치유했다고 한다.
그는 어린 시절 영국처럼 강해지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한 친구의 말에 감화되어 고기를 먹은 적도 있었지만,
힌두교 신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간디는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University College London: UCL)에 입학,
법학을 공부하여 1891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의 어머니는 귀국 전 이미 별세한 뒤였다.
인도 라지코트와 뭄베이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법정에서 말 한마디 못 하고 물러날 정도로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189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나탈 식민지에 부임하여,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간디는 동포들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찾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1894년 6월, 1년 계약이 끝나고 환송 잔치 자리에서
우연히 나탈 의회가 인도인의 선거권 박탈을 입법화하려 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게 됐다.
간디는 1년간의 계약으로 남아프리카의 인도계 상사에서 근무하였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생활은 간디가 백인들에게 교통시설 이용,
취업 등에서 차별당하는 동족들을 보면서 독립운동을 다짐하게 했다.
1894년 7월 정치운동가로 변신한 그는 나탈 식민지 지방의회와
영국 정부에 보낼 탄원서를 작성하고 수백 명의 서명을 받았다.
인도인 차별법의 입법은 막는 것에는 실패하였으나 나탈·영국·인도에까지
나탈 인도인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홍보하는 데 성공했다.
1894년 더반에 머무르기로 결심한 그는 '나탈 인도국민회의'를 창설하고 인도인의 단결심을 고취했다.
또한 인도인에 대한 차별대우의 실상을 국제사회의 여론에 널리 알렸다.
제1차 대전이 일어나자, 전쟁이 끝나면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했던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1919년 반영 운동을 하면 체포 영장 발부 등의 적법한 절차 없이 무조건 잡아갈 수 있는 즉슨,
반영 운동을 이전보다 더욱 가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롤 래트 법이 제정되자
그는 영국의 지배에 다시 반기를 들고 "빵을 구하는 데 돌을 준다"고 항의하면서,
전 인도인에게 영국 상품의 불매·납세 거부·공직 사퇴 등 영국에 대해 폭력 없이 저항을 할 것을 호소하였다.
1922년 체포되었으나 병으로 출옥하였으며, 1925년 국민 회의파 의장이 되었다.
김성수 전 동아일보 사장(호 인촌)이 본인(간디)에게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과 언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조언을 구하자 이에 대한 답신을 인촌 선생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의 근거지였던 인도 서부 사바르 마티에 다른 유품들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힌두교도는 인도로 가는 민족 분열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종교갈등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하자, 간디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였다.
간디의 이러한 모습은 극단적 보수파 힌두교 신도들에게는 이슬람교도를 편드는 것처럼 보였으며,
결국 1948년 1월 30일에 뉴델리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반이슬람 성향의 힌두교 급진주의 무장 단체 국민 의용단의 나 투람 고드세에게 총을 맞아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는 79세였다. 1930년 그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간디는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자에 4번이나 올랐으나 끝내 수상하지 못하였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온 청년들이 서방의 자유로운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힌두교 전통을 무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힌두교 원로지도자들은 간디를 배웅하면 벌금을 물리기로 결의할 정도로 격렬하게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인도와는 다른 런던의 도시 생활과 음식, 예절을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힌두교 전통에 따라 채식을 고집하여, 멀리 떨어진 채식 식당까지 가서 밥을 먹을 만큼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채식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알려주는 책과 식당을 알게 되었으며, 런던 채식주의협회 집행위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