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티르너는 바이에른의 바이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얼마 되지 않는 그의 삶에 대해서는 슈티르너의 전기를 쓴 스코틀랜드계 독일인 작가인 존 헨리 매케이에 의한 것이다.
막스 슈티르너(본명: 요한 카스파어 슈미트·Johann Caspar Schmidt)는 독일의 철학자로서 실존주의,
정신분석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허무주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슈티르너가 20살이 되었을 때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문헌학, 신학, 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이후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헤겔의 강의에 참석하게 된다.
슈티르너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교사 자격증을 얻지만,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전임 교사 자격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철학의 역사, 종교와 철학 그리고 주관적 정신에 대한 헤겔의 강의를 들었다.
이후 슈티르너는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가 그곳에서 공부하던 것과 동일한 시간대였다.
슈티르너는 그로피우스 여학교에서 일하게 되고,
그동안 주저인 유일 자와 그 소유를 쓰게 되는데 이는 다른 사상가인 바우노와 포이어바흐,
빌헬름 바이틀링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authoritarian socialism),
그리고 프루동과 같은 이들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844년 10월 책의 출판으로 인한 논쟁에 참여하기 위해 그는 교직에서 사임한다.
슈티르너는 자아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창조적 무' 언어의 종점이라 묘사한다.
슈티르너는 대체로 심리적 에고이즘과 윤리적 에고이즘의 지지자로 이해된다.
후자의 경우 분쟁의 여지가 있는데, 그러한 주장이 슈티르너의 글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데다가,
그의 이익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억누르는 새로운 고정관념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기실현은 각 개인 그의 욕망에 따라 에고이즘을 수행하는 것에 있다.
마지못해 행해지는 에고이즘과 기꺼이 행해지는 에고이즘의 차이는,
전자는 '공허한' 관념에 사로잡혀 더욱 높은 이유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믿으며,
사소한 행복과 안전을 바라며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다.
반면 후자는, 자신의 가려진 욕망을 전적으로 인식하며 그의 선택에 따라 자유로이 행동하는 자이다.
그가 도덕, 법, 종교, 권리 등의 '신성한' 진리가 단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개념임을 인식하고,
이에 복종하길 거부할 때 그는 자유로울 수 있다.
슈티르너에게 있어서 자유의 추구란 창조자와 창조물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창조자로서 기성 질서를 거부하고, 그로서 기존 질서에서 거부되었던 것이 창조된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파괴가 창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슈티르너에게 있어서 힘은 에고이즘의 방법론이다.
그는 힘을 이용해 얻은 재산만이 오직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철학에서 자발적 에고이스트는 그 자신의 사상의 소유자로서
비자발적 에고이스트는 반대로 소유 당하는 이로써 대조적으로 묘사된다.
그에게 있어서 소유란 단지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쟁취하는 것을 아는 자,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소유는 주어진다." 그리고, "내가 나의 힘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은 나의 것이다. 내가 소유자로서 자신을 주장하는 한, 나는 그것의 소유자이다." 그는 또한 말했다,
"나는 너의 소유 앞에서 수줍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존중심도 없이 언제나 나의 소유로 여길 것이다.
그는 무도덕주의의 측면에서 에고이즘을 옹호했고,
각 개인은 오직 그의 순수한 욕구에 따라 '에고이스트 연합'으로서 단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티르너의 에고이스트 연합이라는 개념은 유일 자와 그의 소유에서 처음 등장했다.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그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정체성(성, 인종, 민족 등)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개인의 집단 정체성(혹은 그것의 도덕성)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며,
이렇게 사람은 세계를 그 자신으로서 직접 마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연계하지 않고서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누군가 그 정체성에서 벗어난다면(혹은 쫓겨난다면) 그는 곧 이데올로기가
그에게 약속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할 것이다.
결국 사람은 그 정신에 복종하는 한 자유로울 권리가 있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전통적인 형태의 혁명 모델을 비판했다.
그러한 운동은 암묵적으로 국가주의적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고전적인 혁명이 결국에는 체제를 전복하더라도 새로운 국가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법과 경찰이라는 모습으로 그 질서를 강제하고,
그 질서를 방해하는 것은 범죄라 칭한다.
이러한 질서에서는 자유의 수호자인 국가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시민만이 자유로운 인간이며,
거역하는 이는 무법자라는 역설이 탄생한다.
그리고 이런 위선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자유주의(liberalism)다.
그러나 만일 국가가 사라진다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 또한 사라질 것이다.
슈티르너는 교육은 전통적인 인본주의적 방법이든 실용적인 현실주의적 방법이든
여전히 진정한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교육이란 개인의 고유성을 보존하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842년 DAS unwahre Prinzip unserer Erziehung (우리 교육의 잘못된 원칙)
마르크스가 편집을 맡았던 라인 신문을 통해 출간되었다.
글은 오토 프리드리히 테오도르 하인시우스
(Otto Friedrich Theodor Heinsius)의 인본주의 vs. 현실주의(Humanism vs. Realism)라는
논문에 반박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슈티르너는 철학은 종교처럼 대상을 귀찮게 하지도,
예술처럼 대상을 만들어 내지도 않다고 하며 신중히 변증법적 삼인조(예술-종교-철학)에서 철학을 빼내 왔다.
사실 슈티르너와 관련해서 철학이란 예술과 철학에 모두 무심한 것이었다.
이로써 슈티르너는 바우노의 종교 비판을 무시하고 그것을 급진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