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베버와 동생 알프레드 베버(그 역시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가 되었다)는 이렇듯 지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1882년 베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법대에 입학하였다.
법과 공부를 하는 동시에 젊은 베버는 경제학 강의를 듣고,
중세 역사와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잠시 스트라스부르에서 독일군으로 복무하였다.
그의 살롱에서는 여러 저명한 학자와 유명 인사가 드나들었다.
베버는 어머니의 인생관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막시밀리안 "막스" 카를 에밀 베버는 독일의 정치가, 법률가, 경제학자, 정치학자, 사회학자로,
사회학 성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며 그의 논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유명하다.
아버지는 국민 자유당의 부유하고 유력한 정치가이자 공무원이며,
어머니 헬레네 팔엔 슈타인(Helene Fallen stein)은 절대적인 도덕 신념을 견지한 칼뱅주의 개신교도였다.
베버 1세가 공직 생활하면서 그의 가정도 정치와 가까워졌으며,
그의 살롱에서는 여러 저명한 학자와 유명 인사가 드나들었다. 베버는 어머니의 인생관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베버의 주요 저작들은 종교 사회학, 정치 체제, 조직 이론, 행위의 합리화를 다루고 있다.
그는 역사 파의 계통에 속해 있으나, 학문 방법론에서는 리케르트 영향 아래 신 칸트파의 입장을 취하였다.
근대 자본주의 특징을 프로테스탄티즘과 관련하여 밝힌 것은 그의 뛰어난 업적이다.
그의 학문적 활동은 사회학·경제학·역사학·법학 등 매우 폭이 넓었으며,
근대의 가장 위대한 사회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베버는 가치문제를 3가지(가치 관련, 가치판단, 가치중립)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베버의 시대는 가치의 혼돈과 가치판단 범람의 시대였다.
당시 독일 대학들에서 대부분의 대학교수는 황제를 찬양하는 소위 어용교수들이었다. 따라서 강의 시간에도 황제를 찬양하고 강의 방식은 자신의 주장과 견해만을 강력히 설명하면서 타인의 견해는 부정, 비판하는 가치판단에 따른 방식이었다. 베버는 이러한 방식을 비판하고, 엄격한 학문 주의적 입장에서 모든 학설을 공정하게 설명해주는 가치중립적 강의를 주장했다. 이를 통해 독일 민족의 꺼지지 않는 지적 심장을 대학 안에 잘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의 또 다른 주요 저작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베버는 국가를 합법적으로 폭력을 독점하는 독립체로 규정하였으며,
이는 현대 서구 정치 과학 연구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베버는 경제와 사회에서 했던 관료제 분석은 현대의 조직 연구에서 아직도 중심적이다.
그의 유명한 업적을 "베버 명제"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는 처음으로 사회에 관계되거나 사회성이 있는 권위의 다양한 측면을 인식하여,
카리스마적 권위, 전통적 권위, 법적 권위로 범주화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관료제를 분석하면서 근대 국가 조직이 합리적인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썼다.
베버는 가치중립을 강의실에서의 가치라고 주장했다.
베버는 대학 강단에서의 개인적(사적) 가치판단을 반대했다.
강의실에서 교수는 강의하고, 학생은 침묵 상태에서 학습하고 있으므로 대등한 입장에서의 비판이 허용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교수의 일방적인 개인적 가치판단이나 개인적 신념의 주입 강의는 불공평하다고 인식하였다.
교수의 개인적 가치판단의 주입 강의는 학생을 자기보다 좁은 시야의 사고를 갖게 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사회와 같이 가치들의 적대성이 지배하고 다신교의 시대에는
개인적 가치판단은 객관성을 갖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베버는 가치중립의 입장을 교수들의 강의윤리라 설명하고,
교수의 성실성은 그가 얼마나 가치중립적 입장에서 강의하는가에 의해 증명된다고 강조하였다.
베버에 따르면, 교수가 해야 할 역할은 여러 가지 가치들과 그리고 목적에 대한
여러 가지 수단들의 관계 선택항목들을 여러 가지 수단들 관계의
선택항목들을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분석하여 제시하는 데 그치고,
가치판단은 유보하여 후에 학생들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물의 근본이나 기초가 되는 가치 관련은 사회학자,
역사학자가 연구 시행 시 가치 설정을 가능하게 한다. 사회에 관계되거나 사회성이 있는
실재는 무한하고 문화의 세계는 가치의 영역이므로 연구자는 설정 없이는 연구를 시작할 수 없게 된다.
베버는 마르크스가 경제에 의해 결정되는 종속적인 반 영물로 본 관념까지도 상대적 자율성이 있으며,
사회 변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논증하였다.
베버에 의하면 위대한 사상가나 학자의 머릿속에 있는 사상이나 관념은 사회변동을 가져올 수 없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관념과 물질력은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관념이 사회변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관념은 물질력과는 다른 방법으로 사회 변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경제적 결정 부문은 경제적 목적을 위해 일부러 창출한 제도들을 뜻한다.
즉, 경제 제도 자체의 영역을 의미하며 은행, 주식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경제적 연관 부문은 그 자체는 비경제적이면서도 경제적으로 연관된 행동과 제도의 영역을 의미한다.
가령, 정치, 법률, 종교 등을 꼽을 수 있다. 경제적 조건 부문은
그 자체로 분명히 비경제적 현상이면서 경제와 연관이 없지만,
간접적으로 시대의 경제 제도의 영향을 받거나 영향을 주는 영역이다.
가령, 문학, 예술 사상 등이 예이다. 이처럼 사회는 경제적으로 연관되고,
경제적으로 조건 지어진 영역이 매우 많으므로 각 부분이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은 대단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베버는 '이념'이라는 용어를 사상의 세상으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것은 이 이념형이라는 용어가 완벽한 것이 아니며 단지 순리를 따르는 사회에 관계되거나
사회성이 있는 실체의 혼란함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내 주는 것을 돕는 사상의 구조로 인식하는 것이다.
베버는 그 사람의 저서에 적기를,
"이념형이란 하나나 다수한 관점에 의해 강조된 한쪽 입장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고 엄청나게 다분화하고
각각의 통합에 의해 그리고 한쪽 측면으로 강조된 여러 관점이 내용을 구성된
여러 요소로 세분하는 구성의 모습으로 통합되는
현재 혹은 종종 구체적인 현상의 부재 등으로 구성된 개념"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