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주체적 삶을 강조한 철학이다. 인간이란 어떤 본질에 지배받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실존적 존재라고 힘주어 말했다. 장 폴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인 1945년부터 1970년대 말까지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정치계에 있어 큰 영향을 끼쳤다. 실존주의를 소개한 사르트르의 저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10월, 그가 파리에서 한 강연을 담은 책이다.
그는 실존주의를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간명하게 표현했고, '실존'이라는 것은 현실 존재를 뜻하고, '본질'이라는 것은 정해진 운명과 같은 것이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열한 살 때까지의 자신 삶을 그려낸 자서전 (말Les Mots)를 발표하고 그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신문(리베라시옹)창간에도 기여했는데, 신문 발행을 광고하고자 본인이 직접 길가에서 그 신문을 팔기까지 했다.
사르트르는 1945년 미국에서 만난 기자 돌로레스 바네티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회상록을 통해 밝혀진 수년간의 관계를 유지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절, 두 번의 긴 여행 동안 미국을 이해하게 한 모든 열쇠를 사르트르에게 쥐여주어 다른 대륙으로의 문을 열게 한, 뉴욕의 프랑스 기자에게 품은 5년간의 열정에 대한 유일한 암시로 (돌로레스에게) 이외에, 철학자 사르트르는 1945년 10월 '현대'의 창간호의 발표를 헌정한다.
장 폴 사르트르는 보나파르트가 42번지에 자리를 잡아 1962년까지 거기서 거주했다. 해방 이후, 사르트르는 현저한 명성과 성공을 거뒀다. 그는 10년 이상 프랑스 문학에 군림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은 그가 1945년 창간한, 국제적 차원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프랑스 잡지로 여겨지는 '현대'라는 잡지를 통해 확산하였다. 장 폴 샤를 에마르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 파리 16구에 있는 외조부 집인 미냐르로 13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르주아 가문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사르트르가 태어난 지 15개월이던 1906년 9월에 황열로 사망한 아버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리세 장송 드 세이의 독일어 선생이자 위엄있는 사람이었으며 사르트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10살까지 그를 가르친, 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처가 아버지로서 할 역할을 했다. 13살에 사르트르는 리세 몽테뉴를 어느 정도 다니다가 16살에 이르러 리세 앙리 4세로 전학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5학년, 6학년 시절을 보낸다. 거기서 그는 훗날 작가가 되는 폴 니장을 만나게 되며 니장과의 우정은 1940년 니장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조그만 책자에서 그의 실존주의 사상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행동적 지식인인 사르트르는 세계 평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발언과 평론을 하는 동시에,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유물론과 혁명', '변증법적 이성 비판'의 저술들은 이러한 계열에 속한다. 사르트르는 프랑스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1945년 그의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실존주의 철학 사상의 선언문으로 여겨진다.
사르트르의 주요 철학서로는 '존재와 무'와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있다. 사르트르가 주장한 용감무쌍한 앙가주망의 이면에는 책임감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책임감이란 자신이 내린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책임이자, 인류에 대한 책임이다.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와 대립했다. 구조주의에서 인간의 자유는 좁은 자리를 차지했고, 인간 개개인은 각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구조 속에 배열되었다.
사회 구조의 필연성에 대한 자유의, 의식에 대한 의식의 우위의 옹호자이던 사르트르는 구조주의라는 새 흐름에 대하여 논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문학 창작과 19세기 연구에, 특히 그를 항상 사로잡은 플로베르의 연구에 헌신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더욱이, 1960년대에 사르트르의 건강은 심하게 악화하였다. 그는 정치와 문학에서 과잉 활동을 한 덕택에, 또한 담배와 술로 인하여 너무 일찍 쇠약해졌다.
노벨 아카데미는 장 폴 사르트르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하지만 철학자 사르트르는, 같은 날 AFP의 기자 프랑수아 드 클로세에게 "나는 그것을 거절하고 당신은 그것에 관하여 쓸 수 있다"고 말하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틀 뒤 1964년 10월 24일, 그는 스웨덴 아카데미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그것에 관련하여 더 길게 설명했으며, 그 본문은 나중에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와 '르피가르'에 각각 게재되었다.
이 사실은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거절의 이유로 사르트르는 "어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신성시되길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 요독증에 걸린 사르트르는 1980년 4월 15일 만 75세가 임박한 나이로 파리 브루세 병원에서 폐수종으로 사망했다. 그는 파리 1986년 4월 14일에 죽은 시몬 보부아르는 그의 옆에 묻혔다. 묘비에는 "Jean-Paul Sartre, 1905-1980"이라는 간결한 비명이 쓰여있다.
전 세계는 사르트르의 사망 발표로 큰 충격에 빠졌다. 1980년 4월 19일에 기행 된 그의 장례식에는 5만 명의 사람들이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파리의 도로를 메우며 장례 행렬을 따라갔는데, 치안 당국 없이 진행된 엄청난 인파 가운데는 르아브르나 파리에서 사르트르가 가르쳤던 옛 제자들, 1950년대의 공산당원과 '리베라시옹' 동지들, 알제리에서의 평화를 외친 사회 운동가들, 마지막으로 젊은 마오이스트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