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알레스에서 7형제 중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사르디니아의 민중들은 이탈리아 변두리에서 사는 가난한 소작인들이었지만,
그람시의 집안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여유가 있는 알바니아 사람의 후손이었다.
할아버지는 부르봉 왕가의 헌병대 대령이었으며,
이탈리아 왕국으로 이탈리아가 통일될 때까지 대령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폴리 출신으로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람시의 어머니도 조반니 보카치오시인의 글을 읽을 만큼,
보기 드물게 지적 소양을 지닌 여성이었다.
아버지가 석방되어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그람시는 1908년 칼리아리 고등학교에 재입학했으며,
형 젠나로와 동거했다.
젠나로는 토리노에서 군 복무하던 중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이탈리아 사회당(Partito Socialista Italiano, PSI, 1892년 결성-1994년 해산)을 선전하는
팸플릿을 동생에게 보내주고 있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주장한 이탈리아,
정치인 그리고 공산주의자이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 중 한 명이며 한때 지도자이기도 하였으며,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서 투옥되었다.
그는 문화 및 정치적 리더십을 분석하였고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를 비판하는
문화적 헤게모니 개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친은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버리고,
하급 정부 관리로 일하다가 공금횡령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구속된 진짜 이유는 지방 유지들에게 밉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지방 유지들의 독재가 만연해 있었는데,
안토니오 그람시의 아버지는 이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1904년 아버지가 석방될 때까지 삯바느질과 텃밭 농사로 가정을 돌봐야 했고
쓰다 버린 초의 토막을 다시 썼다. 4살 때 사고로 장애인이 되어
병약 그람시도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일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호기심, 상상력, 밝은 성격, 강한 의지를 가진 소년이었다.
몸이 약하니까 격렬하고 거친 놀이는 못 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렸고
독서와 나들이를 좋아하며 고슴도치와 도마뱀을 보고 관찰하였다.
이탈리아 사르디니아는 영화 [빠드레 빠드로네]에 나오는 것처럼
부모들이 배움의 중요성을 모르는 무지와 가난 때문에 어린 자식들을 학교가 아니라
산꼭대기로 올려보내서 양을 치게 할 정도로 가난한 동네여서,
광부들과 농민들의 민중 운동이 치열했는데,
그들의 생존권 투쟁은 모두 군대와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되었다.
이를 보고 자란 그람시는 자연스럽게 역사와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 이유는 사회당이 투쟁 정신을 잃어버린 채 적당히 자본가,
지배계급과 타협하는 어용 정당이 되어간다는 반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1915년부터 이탈리아 사회당 기관지 [전진 Avanti] 토리노판 편집위원회 활동,
사회당 지역주간지 [민중의 외침](Grido del Popolo)에 정기적으로 글을 썼는데,
그의 관심 분야는 사회와 정치, 노동운동, 제2 인터내셔널의 짐머발트 회합, 반전 결의,
문화비평 등 다양하였다. 1917년에는 《전진》에 〈자본에 대한 혁명〉
(여기서 말하는 자본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말함.)을 기고하였다.
1917년을 전후로 이탈리아 노동운동이 대단히 전투적으로 전환되어가는데
서구사회에서 전개된 노동자 평의회 운동에 몰두, 점차 사회당 내 좌파 세력을 형성해 나간다.
1919년 토리노 대학교 동창인 안젤로 나스카, 움베르토 테라 치니,
팔미로 톨리아티와 사회당 내 급진 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할 잡지 (신질서 Ordine Nuovo)를 창간하는데
이 잡지는 후일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관지가 됐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1920년대 초에는 두 가지 상극적이지만 중요한 현상이 이탈리아에서 나타난다.
노동운동이 대단한 호전성을 띠고 전개되는 한편, 독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과 나치즘이 확산하여가고 있었다. 1919-20년(붉은 2년) 토리노의
피아트 공장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벌인 공장 평의회 운동이 자본가들과 지배계급의 결탁으로 실패하자
그람시와 그의 동료들은 노동운동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사회당의 미온적
공장 평의회 지지 및 전반적인 보수주의 성향에 있다고 보았다.
즉 그람시와 동지들은 사회당이 좌파 정당으로서 계급투쟁을 하기보다는
지배계급 및 자본가와 타협을 하는 보수화를 비판하여 사회당을 이탈했다.
1921년 리보르노에서 전투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면모를 갖춘
새로운 진보정당인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다. 1915년 전직 사회주의자 무솔리니에
의해 시작된 이탈리아 파시즘은 사회주의 운동에 공포심을 갖고 있던
제대군인들과 자본가들로부터 이미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당은 우유부단하고도 개량주의적 모습을 보였다.
정부와 타협하며 노동운동의 급진화에 제동을 하는 한편, 파시즘의 확산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초대 이탈리아 공산당의 총서기였던 아메데오 보르시가는
이탈리아 사회당(PSI)과의 연합전선 구축을 통해 이탈리아 내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하도록
명하던 코민테른과 갈등하고 있었다.
그람시는 처음엔 공식적으로는 보르디가 노선을 지지하며 공산당의 사회당과의 연합을 반대했으나,
날로 증대하는 파시즘 세력의 위협을 절감하면서 차츰 보르디가의 완고한 비타협적 태도에 회의를 갖기 시작,
코민테른의 연합전선론들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결국 끝까지 공산당 독자 혁명을 고집하던 보르디가는 당내에서조차 차츰 지지 기반을 상실하고,
1924년에서 1926년 사이 그람시가 결정적으로 이탈리아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