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가장 위대한 국제적 업적은 바로 국제 연맹의 구상을 구체적인 계획으로 만들어 현실화 시킨 것이다.
후일, 그는 유엔이 창설되자 유엔 헌장의 서문을 작성함으로써,
국제 연맹과 유엔 헌장에 모두 서명한 사람이 되게 된다.
또한, 그는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들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시켜서
현재의 영연방을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1946년에 국제 연합 총회는 스뮈츠 정부가 유엔 헌장에 작성된 대로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인도인들의 대우를 보장하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가 남아프리카로 돌아와서 검사맡던 중, 1899년 10월 11일 보어 공화국들-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 공화국이 케이프 식민지와 나 탈 식민지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보어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전쟁 초기에, 스뮈츠는 프로파간다를 전달하고 장군들 사이의 통신을 맡았다.
그는 제2차 보어 전쟁 당시에는 트란스발에서 게릴라들을 이끌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를 침공하는 남아프리카 방위군을 지휘하였고
동아프리카의 영국군도 지휘하였다. 1917년부터 1919년까지
그는 영국의 전쟁 내각의 5인방 중 하나였으며 영국 공군을 창설하는 데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1941년에는 영국 육군의 원수가 되어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이 이끄는 제국 전쟁 내각에서 일하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마치는 평화 조약에 모두 서명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트란스발에서 500명의 게릴라를 지휘하는 쿠스 드 라 레이 장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고,
그와 함께 여러 게릴라전에서 활약하여 영국군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드 라 레이가 서부 트란스발로 가면서 스뮈츠는 300명의 게릴라을 이끌게 되었다.
한편, 키치너가 이끄는 영국군은 청야전술을 펼치며 보어인 농장들을 파괴하여 보급을 끊고 있었는데,
거기서 발생한 100여명의 보어인 난민이 스뮈츠 지휘하러 들어왔으나
스뮈츠가 이끄는 병력만으로는 적에 대항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크리칭거 장군에게 가야 했다.
영국이 청야전술로 주변 지역에서 보급하는 것을 끊어놓았기 때문에
식량이 부족하여 게릴라에게 참여하려는 자원자들의 90% 정도를 거절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되는 게릴라전으로 적의 수송로와 농장을 공격하고 아프리카너 프로파간다를 뿌렸다.
심지어 기차에다가 폭약을 가득 적재한 후 광산도시인 오키에프로 보내서 공격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
얀 크리스티안 스뮈츠은 남아프리카 연방과 영국 연방의 주요한 정치인이자, 군 장성, 그리고 철학자였다.
그는 1919년부터 1924년까지, 그리고 1939년부터 1948년까지 남아프리카 연방의 수상을 지내었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 육군 원수를 맡았다.
제2차 보어 전쟁 이후, 1910년 5월 31일에 케이프 식민지,
오렌지강 식민지, 트란스발 식민지, 나 탈 식민지가 합쳐져 남아프리카 연방을 형성하였다.
참정권이 없는 흑인과 유색인을 제외하면 아프리카어들은 최대의 유권자 집단이었고,
굉장한 정치적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프리카어로서
보어 전쟁 기간 동안 영국에 대항해서 게릴라전을 벌인 루이스 보타가 수상으로 지명되었고
스뮈츠는 내무성 장관, 국방성 장관, 그리고 광산 성 장관을 겸직하게 되어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두 번째로 권력이 강한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남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어들의 정치적 역할을 확실히 고정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당을 창당하였다.
보어인들이 점점 불리해지고 결국 1902년 5월 31일 베르니이헝에서 평화조약을 맺게 되는데
평화조약을 맺기 전에 그는 키치너 장군과 만나 보어인들이 항복하는 조건을 크룬 스탠드 역에서 합의하였다.
그는 보어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많은 보어인 어린이와 여자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결국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항복하기로 키치너와 합의하였다.
한편, 1897년에는 부인인 이지 크리세와 결혼하였으며,
1898년에는 트란스발의 파울로 크루거 대통령에 의해 프리토리아의 검사로 발령받았다.
그의 중요성은 심지어 1940년에 영국의 총리로서 스뮈츠를 지명하려는 계획도 있었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이 제안은 처칠의 비서였던 존 콜필 경이 제안하였는데,
조지 6세와 메리 여왕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처칠은 스뮈츠를
아프리카어들로부터 관계를 소원해지게 한 격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당시 남아프리카의 수상이었던 제임스 헤르초흐는 남아프리카 연방은 모국인
영국과 함께 대독 선전포고를 하지 말고 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5년 5월에는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헌장을 작성할 때 남아프리카 대표로서 참가하였다.
그가 1919년 국제연맹을 창설할 때 그러했듯이
그는 이번에도 세계 평화를 보전하기 위한 강력한 헌장을 작성하였으며,
국제연맹과는 달리 유엔에는 국제 분쟁을 막을 강력한 권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유럽에서의 전쟁에 마침표를 찍는 파리 평화 조약에서도 서명함으로써
유일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조약에 서명을 한 사람이 되었다.
스뮈츠는 1982년 제작된 영화 간디에서 아 톨 퓨가드가 연기하였다.
또한 When the Lion Feeds, The Sound of Thunder, A Sparrow Falls, Power of the Sword and Rage 등의
소설에 나오고, 여기서는 날씬한 혹은 똑똑한 얀 혹은 오버 그(아프리칸스어로 나이든 두목)이라는
별명으로 자주 언급된다. 테오도어 헤르츨의 남아프리카 후원자들은 1916년 스뮈츠와 접촉하였다.
스뮈츠는 밸푸어 선언(1917년)을 지지하였고, 미래에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되는 하임 바이츠만과 친교를 쌓았다.
1943년에 바이츠만은 스뮈츠에게 미국과 경쟁할 수 있게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을 편지로 보내었다. 스뮈츠는 수상으로 재직하면서
여러 시오니즘 단체들을 후원하였고, 그의 정부는 1948년 5월 24일 사실상 이스라엘의 건국을 승인하였다.
하지만 스뮈츠는 1937년 헤르초흐의 내각에서 일할 때 1937년 외국인
법률을 제정하여 유대인이 남아프리카로 이주해 오는 것을 막기도 하였다.
스뮈츠는 바이츠만을 위하여 비문을 써 주기도 했는데,
그를 모세 이후 최고로 위대한 유대인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스라엘의 몇몇 거리와 키부츠가 스뮈츠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