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은 1925년 폴란드의 포즈난에서 비유대교의 유대계 폴란드인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1939년 폴란드가 나치에 의해 점령당하였을 때,
그의 가족은 소비에트 연방 쪽을 향하여 동쪽으로 탈출하였다.
바우만은 소비에트연방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게 자원하였고,
정치교육 교관으로 복무하였으며 콜버그와 베를린의 전투에 참여하였다.
1945년 5월 무공 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 잡지의 주장에 따르면,
바우만은 상당수의 지하 조직원을 체포했던 부대의 리더로서 활약했다.
게다가, 그 저자는 바우만이 1945년부터 1948년까지 군 첩보기관의 정보원으로 일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당시에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고 어떻게 그만두었는지뿐만 아니라
그의 협력의 실체와 범위는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이다.
폴란드 연합 노동자당이 조직한 반유대주의 축출 운동으로 1971년 망명한 이후 영국에서 거주하였다.
리즈 대학교 사회학 교수(1990년부터 명예 교수)로서
바우만은 근대성과 홀로코스트 그리고 포스트모던 소비주의 사이 연관성에 관한 분석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2006년 5월에, 보수적 잡지 오존에 발표된 폴란드 민족기억연구소의 한 역사가의 반공식적인 진술에 의하면,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바우만은 폴란드 레지스탕스의 잔당과 싸우기 위해
조직된 군사 조직인 KBW에서 비슷한 기능을 수행했다. KBW에 복무하는 동안,
바우만은 바르샤바의 폴란드 사회과학원에서 처음 사회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철학 공부를 하기 위해 - 사회학은 폴란드 교육 과정에서 "부르주아" 학문이라 하여 제외되어 있었다.
바르샤바 대학교에 진학하였는데, 여기에는 그의 선생이 된 스타니슐파프
오소프스키와 율리안 호치펠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바우만이 "일상생활에서의 사회학"(1964년)을 포함하여 다른 책들을 출판하러 갔을 때,
폴란드에는 상당히 대중적인 독자들이 있었고,
이는 나중에 영어로 쓴 교과서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기"(1990년)의 기초가 되었다.
대중추수주의적인 장관 미에 테크 모 차르에 의해 반시오니즘 운동이 지도되고,
정치적 압력의 증가에 직면하자, 바우만은 1968년 1월 집권당인 폴란드 공산당을 탈당했다.
1968년 3월, 폴란드의 정치적 위기와 함께, 반-시오니즘 운동은,
남아있는 폴란드 유대인들을 대부분 국외로 떠나도록 하는 추방령이 정점에 달했는데,
공산 정부로부터 신임을 잃은 많은 지식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바르샤바 대학교로부터 자리를 잃은 바우만도 속해 있었다.
출국을 허락받기 위해, 폴란드 시민권을 포기한 후에,
그는 처음에 텔아비브 대학교에서의 교직을 위해 이스라엘에 갔었지만,
리즈 대학교가 그에게 사회학 자리를 수락하였고, 그는 여기서 간헐적으로 학과장의 자리를 맡았다.
그때 이래, 그는 자신의 세 번째 언어인 영어만으로 거의 출판하였고,
그의 명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사실,
1990년대 말부터 바우만은 반세계화 또는 대안 세계화 운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바우만이 출판한 저서는 거의 30여권이나 되고,
100여 항목이 넘는다. 이 책들의 대부분은 거의 공통된 주제를 다루는데,
그것은 세계화와 근대성, 포스트 모더니티. 소비주의 그리고 윤리학에 관한 것들이다.
"근대성과 양가성"에서 바우만은, 근대 사회가 그 낯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접근법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소비자 지향의 경제에서 그 낯섦과 익숙지 않음은 항상 매혹적-다른 스타일의 음식,
다른 패션과 여행, 뭔가 익숙지 않은 매력을 경험했을지 모를 여행에서-이다라고 주장했다.
아직 이 낯섦은 아직 부정적인 면이 있다. 그 이방인들은,
그가 통제되거나 규제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공포의 대상이다.
그는 잠재적인 강도이거나, 그 사회의 영역 밖에서 끊임없이 위협하는 사람들이다.
바우만의 가장 유명한 책 "근대성과 홀로코스트"는,
이러한 종류의 공포들에 대한 위험성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근대성과 그 질서를 만들려는 시도에 깊이 연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절차적 이성, 업무를 더 작고 작게 만드는 노동의 분업, 다른 종들에 대한 분류학적 범주화,
규칙을 따르는 것이 도덕적으로 모두 선한 것이라고 간주하게 하는 경향성,
바우만은 이것들이 그 홀로코스트에서 발생하는 자신의 역할을 연기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이유로, 각 현대 사회들이 그 홀로코스트로부터의 교훈을 완전히 취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 바우만의 은유를 사용해서 - 벽에 걸린 그림처럼,
일부의 교훈들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바우만의 분석에 의하면,
유태인들은 유럽에서 "특별한"(par excellence) "이방인"이 되었다.
그에 의해 묘사된 최종적인 해결책은,
그들 안에 있는 기존의 거북하고 해결할 수 없는 요소들을 잘라내기 위하여,
사회들에 의해 그 시도의 극단적인 예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처럼 바우만은,
홀로코스트에서 발생했던 그 같은 배제의 과정이 확장되고 있으며,
아직 활동하고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1990년대 중후반, 바우만의 책들은 두 개의 다른,
그러나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주제 [포스트 모더니티와 소비주의] 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바우만은 20세기 후반기에 현대 사회에서 어떤 전이가 발생했다는 견해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산자들의 사회에서 "소비자들"의 사회로 바꿘 것을 말한다.
이 치환은, 바우만이 주장한, 프로이트의 "근대적" 가치교환 개념을 뒤집었다.
이때 안전은 증가한 자유를 즐기고, 인생을 즐기고,
구매하고 소비하는 자유를 위해 포기되었다.
1990년대 그의 책에서 바우만은 "모더니티"로부터 "포스트 모더니티"로의 전환처럼,
이 전환에 관해 썼다. 밀레니엄 이후,
그의 책들에서 "유동적" 그리고 "고정적" 모더니티라는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그는 "포스트 모더니티"라는 용어를 둘러싼 혼란을 피하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