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계몽기의 대표적 철학자로 꼽히는 볼테르는 프랑스의 지성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종교적 광신주의에 맞서서 평생 투쟁했던 그는 관용 정신이 없이는
인류의 발전도 문명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70세에 가까웠을 때는 그 유명한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종교적 불관용의 희생자들을
변호하고 돕는 활동들을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벌여서
오늘날까지도 관용의 상징적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볼테르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해 가혹하게 탄압하던 개신교도
종교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주장을 한 철학자였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저서들 속에는 당대의 지배적 교회 권력이었던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전통적 가치들의 토대인 기독교 정신을 무너뜨리려 하고, 풍기를 문란케 한다고 비난했다.
작가로서의 볼테르는 비극 작품들과 서사시, 역사물 등을 통해 빠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오늘날에는 별로 읽히지도 않거니와 잘 알려지지도 않다.
반면, 나중에 재미 삼아 쓰고 익명으로 출간한 콩트들이 오늘날까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읽히고 널리 알려진 작품은 [캉디드], [자디그](Zadig, ou la Destine, 1748),
[랭제뉘](L'Ingenu 1767)이다.
디드로의 『백과전서』 집필에도 참여하는 등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평생 왕성한 활동을 벌인 볼테르는 84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그는 일찍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자유사상가와 사귀었다.
1717년 루이 15세의 섭정 오를레앙공작 필리프 2세를 풍자한 시를 썼다고 오인돼 투옥되었다.
출옥 후 비극 《오이디푸스》의 대성공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또한 궁정에서도 시선을 끈다.
그는 '아루에(Arouet)'라는 평민의 성을 버리고 '아루에 2세(Arouet Lejeune)'의
글자 순서를 바꾸어 자칭 '드 볼테르 씨(M. de Voltaire)'가 되었다. 이 필명은 쉽게 받아들여졌고,
왕비는 친밀하게 그를 ‘내 가엾은 볼테르’라고 불렀다. 전제정치의 악폐를 통감한
그는 자유로운 영국에 공감을 가지고 로크와 뉴턴의 영향을 받아 비판 정신은 더욱 강고히 되었다.
수년간을 제네바에서 보내다가 1753년 프랑스령으로 제네바와 가까운 페르네에 정주하며
시·극시·우화·소설·수필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작품을 발표하여 전 유럽에 '볼테르 시대'를 이룩하였다.
진보파의 영수로서 '페르네 장로'라 불렸고 반봉건, 반가톨릭 교회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역사가 볼테르는 《랑송불문학사》를 쓴 귀스타브 랑송은
"볼테르의 기술은 모든 것에 있어서 똑똑히 볼 것을 필요로 하는 끊임없는 이성의 행사이다.
어떤 회화적인 세부가 거기에 끼어들어 가는 때도 있지만,
그것은 보통 이 세부가 일종의 설명 방법이기 때문이다"며
볼테르를 프랑스 근대 역사가의 진정한 선구자로 높이 평가했다.
그는 디드로 등의 백과전서파를 적극 지지하고 기독교적인 광신, 종교적 편견,
독단적 형이상학 등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17세기의 이원론적 경향에 반기를 들어
뉴턴이 확립한 자연과학적 인식을 휴머니즘의 윤리에 의하여 현실 사회와 결부시키려고 하였다.
그의 회의적 상대주의는 자연 과학적 인식의 현실화·통속화의 결과였다.
만년에는 이론적 회의를 실천적 확신에까지 끌어올려 자연법의 규범성을 신이 준 불변의 법으로 인정하려 하였다.
그가 주목을 받은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으나, 유럽의 모든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볼테르는 프로이센 왕의 만찬 석상에서 이 책을 구상했다.
그리고 1764년 철학 사전이라는 표제 아래 한 권의 책을 간행하는데 그것이 판을 거듭하면서 불어나,
몰랑판으로 4권의 분량이 되기에 이르렀다. 처음의 표제는 《휴대용 철학 사전(Dictionnaire philosophique)》이었다가,
나중에 《알파벳 순의 이성(La raison par alphabet)》이라고 고쳤다.
이 작품은 파리고등법원에 의해 소각되고 작가에 대해서 맹렬한 비판이 일어,
경망하고 부패하고 파렴치하고 맹수 같은 사람이라는 비난받았다.
이 작품 역시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하고 있다.
볼테르가 인식하고 있는 인간과 그 인간이 깃들이고 있는 지구의 실체는 비참하리만큼 초라하다.
지구라는 이 행성은 기껏 하나의 ‘진흙 덩이’ 혹은 ‘진흙 원자’에 불과하다.
또는 하나의 ‘개미탑’이나 ‘두더지 흙 두둑’일 뿐이다. 그리고,
광막한 우주 공간에서 그 ‘먼지 알갱이’ 표면에 기생하며 꺼떡거리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벌레’나 ‘좀’의 꼴과 다름없다.
그렇건만, 그 무한히 작은 것이 무한히 거만하다.
심지어, 그 보잘것없는 주제에, 유독 자기들에게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는 점을 무슨 특권처럼,
혹은 절대자가 내린 신표(信標)처럼 자랑스러워한다.
런던에 망명한 젊은 볼테르는 거기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1726년).
그는 그곳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에 감동한다.
그는 프랑스에 돌아와 자국민들에게 자유로운 정치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전제주의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압제를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주려고 하였다. 볼테르는 [샤를 12세의 역사], [루이 14세의 시대], [각 국민의 풍습·정신론], [캉디드] 등이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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