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가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던 위기의 공화정에서 키케로는 세 치 혀로 카틸리나 음모를 막았는데,
이 연설이 바로 카틸리나 반박문이다. 하지만 본인도 자랑스럽게
여긴 이 성공은 기원전 58년 음모가들을 재판 없이 처형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망명길로 몰아넣었다.
기원전 57년 로마로 돌아온 키케로는 폼페이와 카이사르가 주름잡은 정계에서 더 이상 주요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 1월 3일 이탈리아 아르피눔에서 태어나
기원전 43년 12월 7일(율리우스력) 포르미아에서 사망한 로마의 변호사, 정치인이자 라틴어 작가이다.
이탈리아 유산 계급 출신의 로마 시민이던 키케로는 귀족 계층에 속하지는 않았는데,
귀족들은 원칙적으로 그에게 주요 정치적 역할을 주지 않고자 했다.
동시대인 폼페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는 달리 키케로는 군인 경력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수사학과 법학을 건실히 다지고 나서 그는 변호사로서의 소질을 충실히 발휘하여 기원전 63년에는 최고 행정직,
집정관이 되어 출세하는 데 성공했다.
훌륭한 연설가이던 키케로는 고전 라틴어 표현의 전형으로 평가받은 풍부한 작품들을 집필하였으며,
이 중 대부분은 현재까지 전해진다.
키케로는 정계에서 활동을 멈춘 시기 동안 수사학 저서 집필과 희랍 철학 이론의 라틴어 수용에 헌신했다.
중세 동안 부분적으로 잊혔던 키케로의 작품들은 카롤링거 르네상스,
이후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고전 시기에 다시 조명받았다. 하지만 19세기와 20세기 전반 동안,
키케로는 그저 그리스 철학자들을 집대성한 인물로만 평가받았다.
기원전 88년에서 82년에 걸쳐 키케로와 같은 고향 출신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당시의 원로원 후원받던 술라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 동안 키케로는
아카데미 학파의 필론 밑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익히게 된다.
26세에 아버지 살인 혐의로 고소된 로스키우스를 성공적으로 변호함으로써 로마의 정계에 알려진다.
79년에서 77년 사이에 아테네, 소아시아 지방과 그리고 로도스섬을 두루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힌다.
기원전 75년 31세의 나이로 재무관에 선출된다.
5년 뒤 안찰관에 선출되어 재임 동안 유명한 베레스 반박문을 쓰고,
기원전 66년 법무관에 선출되어 당시 정계의 실권자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변론을 쓴다.
43세의 나이로 (기원전 63년) 이른바 지방 신출내기(homo nous)로서 로마 최고 관직인 집정관에게 선출되었다.
집정관 재임 시 카틸리나 역모 사건을 적발하고 원로원 최종권고(senatus consul tum Ultimum)를 선포한 뒤,
일당 5명을 붙잡으면서 로마를 위기에서 건졌지만,
이때 재판도 없이 혐의자를 처형한 문제로 나중에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존 원로원 체제의 문제점을 공격하는 도구로 그 사건을 이용했다.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이에 벌어진 로마 공화정의
내전에서 키케로는 어느 편에 가담할 것인가 하는 갈등 끝에 결국 원로원파인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한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패배함으로써 내전이 끝나자
키케로의 운명은 카이사르의 말 한마디에 달리게 된다.
기원전 60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그리고 크라수스가
제1차 삼두정치 협약을 하게 되자 공화국 체제를 고수하는 키케로는 이들 실권자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
더군다나 키케로에게 개인적으로 유감이 있는 클로디우스는 이 기회를 틈타
키케로가 집정관 재직 시 카틸리나의 모반 가담자 5명을 불법으로
처형한 사실을 들추어내어 고소함으로써 키케로를
약 1년 6개월 동안 (기원전 58년 3월 -57년 8월) 로마에서 추방한다.
귀향 허가를 받아 로마로 돌아와 정계에 거리를 두면서 주로 저작 활동을 한다.
이 시기(기원전 55년-5년)에 키케로는 [웅변가에 관하여](De Ora tore),
[키케로의 국가론](De re public), [법론](De legibus) 등을 썼다. 정치가로서 키케로는
역사의 거센 흐름에 좌절되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반면,
문학자로서 그의 이름은 라틴어 문학사에 길이 남아있다.
이른바 고전 라틴어는 키케로에 의해서 비로소 그 틀이 잡혔으며
그의 라틴어 문체는 곧 고전 라틴어의 표본으로 간주하고 있다.
철저한 공화주의자인 키케로와 공화정에 반발을 가지고 있는 카이사르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의 입장이었으나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상당한 친분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대부분의 지역이 4세기 중엽까지 로마 제국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 밑에 있는 동안 라틴어는 이들 지역에서 이른바 관용어로써 쓰이게 되었으며,
로마제국의 멸망 후 중세기를 거쳐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라틴어는 계속 문어로서 두루 쓰였다.
여기에서 라틴어 문어를 올바로 쓰고 배우는 첫 과정에서 언제나 키케로의 변론문을
라틴어의 표본으로 삼았으며 이와 같은 전통은 오늘날까지 라틴어를 배우는 데에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기원전 43년 12월 7일 모든 희망을 버리고 로마를 피신하던 키케로는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살생부 명단에 올라가게 되고,
그 뒤 안토니우스의 사주를 받은 부하에 의해 카이에타에서 암살당했다.
키케로는 머리와 두 손이 잘려 죽었는데,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머리와 두 손을 로마 광장에 내다 걸었다.
공화주의 신념을 잃지 않고, 글로써 안토니우스를 규탄한 키케로를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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