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카뮈는 인권 운동에 자신의 전력을 다 바쳤다.
1952년 UN이 프랑코 치하에 있는 스페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자 UNESCO의 임원직을 사임했다.
1953년 그는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한 소비에트 연방의 방식을 비난했다.
1956년 그는 폴란드에서 일어난 같은 방식의 파업 분쇄와 소비에트 연방이
10월 헝가리 반란을 진압한 데 대하여 저항의 소리를 냈다.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피에 누아르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카뮈는 그의 평화주의와 세계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는 사형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여 주장했다.
사형 반대 운동에 대한 그의 주목할 만한 기여로 사형 반대협회의 설립자인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와 협동하여 쓴 에세이가 있다.
카뮈는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한 1943년 신문의 편집자가 되어 전투 이후를 보도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편집인으로서는 드물게 1945년 8월 8일에 일어난 사건 직후에
히로시마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는 논설을 실었다.
카뮈는 콩바가 상업적인 신문이 되자 1947년 사임했다. 이때부터 카뮈는 장 폴 사르트르를 알게 되었다.
1949년 카뮈의 폐결핵이 재발하여 2년간 은둔 상태로 살았다.
1951년 그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명쾌하게 반대하는
반란과 반역에 관한 철학적 분석의 내용을 담은 [반항하는 인간]을 발표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 있는 그의 많은 좌익 성향의 지식인 동료들을 화나게 했고
결국 사르트르와의 논쟁을 통하여 그와 사실상 절교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카뮈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그는 문학 활동을 멈추지 않고 연극들을 번역에 집중했다.
그는 알제리계 프랑스인(pied-noir)의 정체성을 택하여 프랑스 정부를 옹호하였다.
그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의 반란이 이집트 주도의 신 아랍 제국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정책인“유럽 둘러싸기”,
“고립된 미국”, “반서방 주의”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
카뮈는 알제리에 더욱 큰 자치권을 인정하거나 연방정부를 구성하면
알제리계 프랑스인과 아랍인들 간의 공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알제리의 완전 독립에는 부정적이었다.
철학에 대한 카뮈의 기여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시 지프 신화]에서 설명하고 [이방인]과 [패스트]와 같은 많은 작품에서 설명한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
세계의 의미, 정순함에 대한 우리의 열망의 결과에 따른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사상이다.
그의 학문적 동반자 사르트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카뮈가 실존주의자들의 캠프로 굴러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에세이 에니그마와 다른 작품들을 통해 그에 대해 이념적 꼬리표를 붙여 분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 많은 중요 부분은 실존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전쟁 기간 그는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정전협정을 위하여 헌신했다.
이러한 활동 뒤에 그는 사형에 직면한 체포된 알제리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그는 1957년 스톡홀름 대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며 알제리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알제리에 사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염려된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프랑스의 좌익 지성으로부터 더욱 극심한 배척을 야기하였다.
그는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1967년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 박람회에서
장 폴 사르트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네 명의 프랑스 작가 중 하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많은 작가가 개인의 부조리에 대해 정의하고 해석하여 왔으며,
부조리의 중요성에 관한 그들 나름의 생각에 대하여 글을 써왔다.
카뮈는 부조리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며 부조리주의 철학자로 계속 여겨지는 것을 후회했다.
카뮈는 [시지푸스의 신화]를 출판한 이후 점차 부조리주의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연구자들은 카뮈의 사상을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하여 부조리의 모순을 말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관한 생각은 1937년 발간된 그의 첫 에세이집 《안과 겉》에 나타나 있다.
부조리 테마는 1938년 발간된 그의 두 번째 에세이집 《결혼》에 좀 더 세련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에세이들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철학적인 설명을 하거나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고,
대신에 부조리의 경험을 투사하고 있다.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이해는 대중의 토론을 고양했다.
그의 다양한 제안은 우리를 부조리에 대하여 생각하고 우리 자신이 기여하도록 유혹하였다.
협동, 울력, 일치와 같은 개념은 카뮈에 관한 중요한 열쇠이다.
카뮈는 자기 삶을 통틀어 독일의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다양한 형태에 관하여
수많은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반대 행동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젊은 시절,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치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유명한 레지스탕스 저널 콩 바(combat)의 편집장을 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을 수행하였다.
카뮈 사후, 두 개의 작품이 유작으로서 출판되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방인과 흡사한 Meursault이라 불리는 인물의 특징을 그린 행복한 죽음이라
명명된 책이었는데 1970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의 관계에는 많은 논쟁이 있다. 두 번째 유작은 미완성의 소설로
카뮈가 죽기 직전까지 집필한 최초의 인간이다.
이 소설은 알제리에서의 어린 시절을 그린 자전적 작품으로 1995년에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