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들뢰즈의 '기계' 개념을 단어를 찾아보면, 동력을 써서 움직이거나 일하는 장치라고 정의되어 있다.
철학에서는 이런 기계의 정의에 충실한 '기계론'이라는 이론이 있다.
질 들뢰즈는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이다. 1960년 초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들뢰즈는 문학, 철학, 예술, 영화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저작을 썼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기계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해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실현하는 도구를 뜻한다.
인간보다 도구의 의미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으로,
운동체가 된 기계가 인간의 행동을 실현해 주는 것이다.
들뢰즈는 근원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언급하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철학 용어를 사용해 인간의 이성, 의식,
나아가 이서에 바탕을 둔 문명을 최고로 믿었던 근대 사상을 뿌리째 뒤엎고자 했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나 삶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제2차세계대전 중 리 세 카르노에게 재학했으며,
이후 파리 8대학의 교수를 맡기도 했다.
들뢰즈와 가타리와의 협업 이전인 초기 들뢰즈의 주요 철학적 프로젝트는 단도직입적으로
'동일성과 차이의 전통적 형이상학상 관계의 체계적 전복'으로 요약된다.
현실에 정직하게 직면하기 위해 우리는 존재와 정확한 그대로를 파악해야 하며,
동일성의 개념들(형식, 범주, 유사성, 통각, 술어 등)은 그 자체로 차이를 이룰 수 없다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차이은 동일성에서 파생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예를 들어, "X는 Y와 다르다"고 할 때, 이는 어떤 X와 Y가 최소한 비교적 안정적인 동일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모든 동일성이란 차이성의 결과라고 선언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같은 속(屬)의 사물 간 성질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으로 볼 때,"
동일성은 논리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나 차이성에 앞서지 않는다.
이는 두 사물이 전혀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개체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범주가 원래 차이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나타낸다.
"X"와 같은 명백한 동일성은 끝없는 차이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서 "X" = x와 x 간의 차이고, "x" = ".간의 차이," 등등이다. 차이는 계속 이어진다.
"철학이 사물에 대해 긍정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면,
이는 다만 철학이 사물 자체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것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차이,
즉, '내적 차이'로서 파악함을 표방할 때뿐이다." 동일성에 기초한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에 따라,
들뢰즈는 개체 개념이 차이성의 구속과 중단 개체"라는 말의 어원이 보여주듯이]이라고 비판한다.
정치학과 윤리학에서, 비록 날카로운 니체 적 해명이지만,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반복한다. 사회의 전통적 자유 모델의 관점에서, 도덕은 개체에서 출발하며,
이들은 추상적인 자연권이나 그들 자신 혹은 신에 의해 정해진 의무를 부담한다.
민족국가 및 자본주의로의 "욕망 생산"(프로이트와 마르크스 사상의 특징이 조합된 개념)의 응고와 통제로 서술한다.
들뢰즈는 마르크스와 같이, 자본주의의 전통적 사회 계층 파괴를 해방으로 여기지만,
모든 가치를 시장의 목적에 따라 균질화하는 데 대해서는 맹비난한다.
역발상을 꾀하는 현대인에게 참신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철학이 '리 좀'이라는 개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창한 리 좀은 '트리(tree)'라는 개념과 대비되는 사고법이다.
이 트리와 리 좀은 인간의 사고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형으로,
트리는 근대의 서양 사회를 지배한 사고법이다.
트리형 사고법은 먼저 확실한 기본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기준으로 몇 가지 유형이나 예외를 생각해나가는 방식이다.
하나의 중심에서 퍼져나가는 수직적 나무 구조와는 반대로,
유연하게 다각도로 퍼져나가는 수직적 나무 구조와는 반대로,
유연하게 다각도로 퍼져 가는 리 좀의 수평적인 발상은 현대 사상의 사고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및 후설과 같은 철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사유의 전통적인 이미지는 사유를 대개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작업으로 오해하고 있다.
진리는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사유는 적어도 원칙상, 사실, 형식, 생각 등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들뢰즈의 색다른 형이상학은 똑같이 이례적인 인식론,
혹은 그가 "사유(생각) 이미지"의 변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반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관점이 형이상학적 흐름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부정하며,
진실한 사유는 현실에 대한 폭력적 대립, 곧 수립된 범주의 무의식적인 파열이라고 주장한다.
진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바꿔놓는다. 신(神)의 눈,
곧 중립적 시각을 얻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확실하고 고정된 진리를 낳는 사심 없는 추구와 상식의 정돈된 확장은 그에 가까운 최상의 것이다.
사유에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이 있다는 가설을 차치한다면,
우리는 "이미지 없는 생각," 곧 문제를 풀기보다는 그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생각을 얻는다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이 모든 것은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 코드나 공리를 상정하지만,
또한 고유한 합리성을 갖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신학과 같다.
죄, 원죄 없는 잉태, 그리고 성육신을 받아들인다면 그에 대한 모든 것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이성은 항상 비이성으로 깎아 만들어진 지역이다.
비이성이 전혀 피할 바가 되지는 못하지만,
그로서 횡단하고 오직 그 비이성적 인자들 속에서의 특수한 종류의 관계로서 정의된다.
들뢰즈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을 재해석하는 '철학사가'로서의 들뢰즈이고,
다른 하나는 다방면의 개념들(반복, 차이, 감각, 철학,사건 등)을 무한 질주하는 '생성의 철학자' 들뢰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