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드로는 1713년 샹파뉴의 랑구르에서 칼 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6남매 중 네명이 살아남았는데 드니 디드로는 맏이였다.
드니는 두살 어린 여동생 데니스 디드로(Denise Diderot, 1715–1797)를
'여자 소크라테스'라 종종 부를 정도로 존중하곤 했다고 한다.
드니 디드로는 프랑스의 백과전서파를 대표하는 계몽주의 철학자이자 작가이다.
돌바크와 함께 무신론을 가장 먼저 말한 철학자에 속한다.
1746년 디드로는 자신의 첫 저작인 철학적인 생각들(Penées philosophiques)를 썼다.
이 책에서 디드로는 이성이 어떻게 감정과 관계를 맺어 조화로운 상태에 이르는가를 논한다.
디드로는 감정이 없다면 도덕도 나빠지고 숭고한 작업은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훈육되지 않은 감정은 파괴적이고 이성은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디드로는 이 시기에 이신론자였기 때문에 이신론을 옹호하고 있으며 종종 무신론을 공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비판도 역시 담고있다.
달랑베르와 함께 18세기 계몽철학 사상을 집대성한 기념비적 저작 [백과전서] 편집자이자
소설, 철학, 미술비평, 희곡 등 다방면에서 수많은 저작을 남긴 계몽주의의 대표적 문필가이기도 하다.
파리 제 7대학의 별명으로 그의 이름이 붙어있다.
그의 열정은 서적상들을 자극하였고, 처음보다 더 많은 예산을 만들어내게 했다.
달랑베르는 디드로의 동료가 되기로 하였으며, 정권의 승인을 얻었다.
1750년에 식자층에게 전달된 취지서는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렸으며,
1751년에 첫 번째 권이 출간되었다. 마지막 권이 출간된 것은 1765년이었고 백과전서,
과학-예술-기술의 구조적인 사전의 마지막 권이 독자 손에 쥐여진 것은 1772년이었다.
디드로의 초기 작품들에는 템플 스태냔의 '그리스의 역사'(History of Greece, 1743)와
로버트 제임스의 '의학사전'(Medicinal Dictionary, 1746-1748)이 포함되어 있다.
1745년엔 샤프츠베리의 미덕에 관한 탐구(Inquiry Concerning Virtue and Merit)에 자신의 평가를 담아 출간하기도 했다.
서적상인 앙드레 르 브르통은 디드로에게 체임버스
백과사전(Cyclopaedia, or Universal Dictionary of Arts and Sciences)을 불어본으로
번역해보지 않겠냐고 제의를 해왔다. 디드로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번역의 취지 자체를 바꾸어버렸다. 체임버스 백과사전을 다시 번역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세상의 모든 새로운 개념, 능동적인 작가, 새로운 지식을 하나의 지붕 아래에 담자고 설득한 것이다.
디드로는 혼자서 수백 편의 글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짧은 글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꽤나 긴 글들이었다.
게다가 다른 기고자들 원고의 고증 작업을 대신하면서 다듬는 도중 시력에 손상을 입기도 하였다.
그는 낮에는 작업장에서 각종 시스템에 대해 익히고,
밤에는 낮에 익힌 것들을 글로 풀어내는 식으로 집필을 계속해 나갔다.
실로 미치치 않으면 할 수 없었던 그 작업 사이에도 경찰을 비롯한 각종 사람들로부터 지속적인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끊임없는 정치적 박해에 시달렸고 동지들의 이탈로 고통받아야 했다.
반면에 프랑스 지배 계층은 백과사전파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백과전서는 종교적 관용, 사상의 자유, 과학과 기술의 가치 등에 대해 논했기 때문이다.
결국 1752년 2월 왕정은 백과전서를 금서로 지정했다.
덕분에 백과전서는 공개적으로 출판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고 비밀리에 출판되는 수밖에 없었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작업이 끝났지만 결국 그의 고행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권력의 비위를 건드릴까 두려웠던 출판업자들이 위험성 있는 텍스트 일부를 제거하고 출판했기 때문이다.
디드로의 <한 집안의 아버지>는 1761년에 프랑스 극장에서 상연,
상연 횟수 7회라는 당시로서는 명예 있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너무나 도덕과다였다고 하겠으며 예술적 가치가 낮아, 오늘날에 와서는 별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사생아>는 작품으로는 더욱 서투르고 1771년 프랑스 극장에서의 상연은 배우들의 적대감정도
곁들여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연극에서는 고전주의적 문학관과 같이 인간의 보편적인 성격을 문제로 삼지 않고,
시대나 국가나 직업이나 지위에 따라 특정한 처지에 놓인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는 관념적·추상적인 인간성의 파악에서 리얼리즘적 방향으로 한걸음 더 나아갔다고 하겠다.
동시에 이 처지에 부과되는 의무를 훌륭하게 다하는 시민도덕을 종용하고 이를 무대에서 읊는 긴 대사를 소중히 여겼다.
작품의 예술적 가치보다도 미덕으로 관객을 감동시키고 눈물을 유발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는 시민생활을 다룬 이 새로운 연극을 정극(正劇)이라 이름지어 여기에 어울리는 산문의 채용을 권장했다.
디드로의 연극관은 볼테르의 경우에 비해 훨씬 혁신적이라고는
하나 아직도 많은 고전주의적 희극 요소를 남기고 있었다.
예컨대 그의 정극(正劇)은 비극과 희극이라는 종래의 장르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 중간에 새로 '시민적 비극' 혹은 '성실한 희극'을 포함하는 중간적 장르를 창시했던 것이며,
고전극의 중요한 규칙인 '삼일치(三一致)의 법칙'도 이를 합리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1757년에 그는 희극이라고 자신을 갖고 내놓은 작품 <사생아>와 함께 이 작품의 의도와 테크닉을 분석한
<사생아에 관해서의 도르바르와의 대화>를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