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에서 첫 번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죽음은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등에 의해 '신성 모독죄'와 '젊은 세대들을 타락시킨 죄'로 기소당하고 기원전 399년에 71세의 나이로
사약을 마시고 사형을 당했다.
오늘날에는 철학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소크라테스지만, 원래 그는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평범한 석공으로 자랐다. 소크라테스는 석공이자 조각가였던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산파였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는 아테네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장 초기에는 직업을 이어 전해지길 당시 문화에 따라 아버지 밑에서 석공 기술을 배우며 천문학, 철학, 기하학 등을 공부했고, 청년에서 40세까지 세 번에 걸친 전쟁에 중장보병으로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다.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원로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더 알고자 노력하면, 지혜와 지식이 늘어나서 현명해질 기회가 생긴다. 진리에 한층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 개념이다. 겸허하게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말은 곧 진리에 가까워진다는 말과 동일하다.
스스로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 어느 사람도 자기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하던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장인이 탁월함을 발휘하려면 자기의 기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듯, 인간으로서의 훌륭함, 즉 덕을 발휘하려면 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덕은 인간에게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는 대화를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고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학자 소크라테스는 노벨상을 받은 적이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노벨상도 없었고, 전반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부패하던 시기였다. 대신 그는 철학의 아버지로 오늘날까지도 역사에 이름을 깊이 알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겸손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악덕을 '무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덕은 이성적 사고의 기초하에 생겨난다. 또한, 덕의 확대는 사회를 더 이성적인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기준점이다. 또한, 이성의 냉소로 인한 부덕함이란 개념 자체를 비판했다.
그는 악덕한 자는 필연적으로 앎이 부족한 무지한 상태에 있다고 봤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냉소적 이성'은 성립할 수 없다고 봤다. 그의 이러한 지행 합일론은 그가 도덕·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했으며, 자신의 가르침이 있어야 하는 청년들을 무료로 가르쳤다. 그리고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오늘날은 질문도 능력이라고 여기며 질문하는 힘을 중요시한다. 질문에 답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 답을 준다.
말년에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재판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지나가는 청년들을 붙잡고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그는 질문을 되풀이함으로써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다. 대화법은 상대방 스스로 답을 찾아내도록 도움을 준다는 의미로. 출산을 돕는 산파에 빗대어 '산파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하게 하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바른 판단으로 유도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 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다이몬은 고대 신비주의자들이 공통으로 찾았던 의식의 바탕이 되는 일종의 심연 의식이다.)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 대화법의 핵심은 질문하고 나서 바로 답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곧바로 정답을 이야기해 주면 상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질문의 받은 사람은 강렬한 자극을 받고, 질문의 통해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진리에 가까워지기는커녕 도달할 수 없다. 생각할 기회조차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질문이 중요한 이유이다.
소크라테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고 질문했다. 소크라테스는 육체-영혼 이원론자였다. 그는 육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그저 껍데기일 뿐이고, 지식은 영혼 안에 내재한 개념이라고 봤으며, 영혼은 불멸한다고 봤다. 인간은 영혼을 소유한 존재이지만, 육체의 감각적 요소에 의해 영혼에 내재한 진리를 통찰하는 것을 계속 방해당한다고 봤으며, 그는 이를 극복하면 만 지식을 얻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극복 방법은 바로 이성적 사고에 기초한 산파술로 감각으로 인해 얻은 여러 '오류'를 하나씩 잡는 것에 있다고 봤다.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여 그는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죽음'을 긍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