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며 역사가이다. 서양철학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 관련된 인물 중 손꼽히는 인물이다. 흄은 자신의 저서 [인성론]에서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고 표현했다. 인간의 정념, 정념의 사전적인 의미는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이다.
데이비드 흄은 1711년 4월 26일 북쪽에 위치한 천 사이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흄은 변호사였다. 그는 1734년 성을 Home(Hume으로 발음)에서 Hume으로 개칭했는데 이는 Home의 잉글랜드 발음이 스코틀랜드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정념의 종류를 구분하면 직접 정념과 간접 정념이 있다. 간접 정념은 쾌와 불쾌에 다른 성질이 곁들여져서 나타나는 것이고, 쾌와 불쾌에서 생겨나는 직접 정념이 있다. 흄은 인간의 경험에 앞서 규정된 것들(인과론, 도덕, 신 관념 등)을 회의하였다.
관념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적 벽돌인 인과론을 흄은 회의하였다. 흄은 인과론이 실은 습관에 의해 귀납적으로 확립된 개연성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원칙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에 대한 체험이 인과론이라는 비교적 강한 개연적 법칙을 확립한 것이다. 필연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실은 개연적인 것이다. 이것이 흄의 회의론적 방법론이 도달한 지점이다.
흄이 생각하는 덕이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일반적으로 바라볼 때 쾌락을 주는 정신적인 성질이고 악덕이란 고통을 낳는 성질을 의미한다. 흄이 강조한 정념론은 추상적인 원리나 법칙에서 도출되는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을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난 뒤에 확립한 학설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칸트는 흄의 인성론을 읽고 '비로소 나를 독단의 잠에서 깨워 주었다.'라고 말했다. '독단의 잠'이란 이성을 가리킨다. 오늘날 철학 학자들은 흄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을 철학 사상 가장 중요한 책 가운데 하나로 평가하지만, 당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비평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당대의 비평은 이 책이 "추상적이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흄은 낙담했으나 곧 그의 쾌활한 성품으로 실망을 딛고 철학에 대한 열정을 되살렸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서문에서 "인간 과학은 유일하게 다른 모든 과학을 뒷받침하는 과학"으로 "체험과 관찰"이라는 경험적 방법에 의해 연구되는 과학이라고 주창하였다. 흄의 이러한 견해가 정확히 어떠한 것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 간에 의견이 엇갈려 왔다.
논리 실증주의는 흄의 이 발언을 근거로 과학은 오직 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것만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경험적인 방법에 의해 검증할 수 없는 것은 진실이나 거짓으로 판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흄은 다방면에 걸쳐 연구를 남기고 있다. 흄은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의 서두에서 인간 심리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흄은 논리 실증주의의 선구자로서 경험에 의한 것만을 바탕으로 철학을 펼친 것으로 평가된다.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논리실증주의가 흄이 자신을 소극적인 회의론자로 파악한 것에 반하여 확증된 원칙을 세워 회의론을 거부하고 있다고 비평한다. 흄은 뉴턴의 자연 탐구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 정신의 기초적 사실을 분석하고, 거기에 의해서 '인성의 원리'를 밝히고, 여러 과학을 체계화하려 했다.
흄의 철학에서 인간의 심리 현상의 제1요소는 로크와 같은 '관념'이었다. 지식의 기원이 인상에서 오는 관념 이외에 없다고 한다면, 경험 과학의 기초인 인과(因果)의 관념은 원인과 결과가 사실상 결합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낯익었다는 것, 즉 습관에 따른 확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어 객관성을 상실해 버린다.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도 결국 '관념의 묶음'에 환원된다. 흄의 논리학은 후일 학파에 따라 논리 실증주의적인 입장과 회의론적 사실주의의 입장, 또는 그 둘의 절충으로 해석된다. 국가의 대부분의 인구에게 문화적 세련됨을 가져다줄 것으로 보았다.
상업은 사람들의 물질적 불평등을 해소하게 할 것으로 보았고, 무역은 중산층의 수준을 향상하게 시킬 방안으로 보았다. 또한 만일 국민들이 부유해지게 되면, 정부의 독재적 권력은 약해지고, 제한받게 될 것으로 보았고, 이 부유하게 된 중산층은 정부의 의존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흄은 상업과 무역이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보았다. 그는 처음에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이후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8세에 철학에 대한 "사고의 새로운 지평"을 경험하였다고 술회하고 있으나 그 "지평"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설명하지 않아 갖가지 추측만 있을 뿐이다.
흄의 종교에 대한 저작인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는 흄의 사후인 1778년이 되어서야 여전히 저자의 이름이나 출판사의 이름도 표기하지 않은 채 출간되었다. 이러한 조심스러운 대처에도 불구하고 흄은 생시에도 이미 자연신론자 또는 무신론자로 의심받았다.
흄은 일찍이 논고 [종교와 미신에 대해]에서 모든 종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였다. 의 저서인 <영국의 역사>에서 그의 생각을 펼쳤다. 또한 그는 장로교나 청교도에 반대하는 의견을 펼쳤는데, 이것은 그가 독립 정신에 대한 반감을 표출한 것으로 해석된다.
흄은 정치면에서 회의적이면서 온건한 토리당에 속했다. 흄의 토리 당적 보수주의가 독립 정신에 악영향을 미친 것을 우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새뮤얼 존슨은 흄을 아무 원칙이 없는 토리당파라고 칭하면서, 만일 그에게 생각이 있다면, 토머스 홉스의 추종자라고 평가하였다. 도덕에 관해서 본다면, 흄은 도덕을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동정을 도덕의 심리적인 기초로 하였다. 본래 주관적인 도덕 감정은 제삼자의 동감에 의해서 객관적 타당성, 사회성을 얻는다고 하는 것인데, 이 설은 공리주의적 도덕론의 선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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