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aura-tiki 2022. 6. 26. 20:56

언어를 철학적으로 고찰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도구와 사용법의 다양성, 단어와 문장 종류의 다양성을 논리학자가 언어의 구조와 관련해 주장해 돈 바와 서로 비교하는 일은 흥미롭다'라고 언어의 다양한 사용법을 '언어 게임'이라고 명칭 했다.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심리 철학, 수학 철학, 논리학, 언어 철학을 다룬 오스트리아 영국 철학자이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 비트겐슈타인은 1년째 은둔 생활하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크게 충격받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육군에 자원하였다. 전쟁 기간 비트겐슈타인은 군인의 눈으로 목격한 천박을 대상으로 한 경멸을 노트에 기록하였다. 종전 뒤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노트에 철학과 종교를 대상으로 한 단상을 적어나갔다. 노트에 적힌 단상을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종교를 향한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 비트겐슈타인은 종교를 대상으로 해 불가지론다운 태도를 견지했는데 전쟁 중에 비트겐슈타인은 레프 톨스토이의 [믿음 안의 찬송]을 갈리치아 루마니아 왕국에 있던 한 서점에서 구입한 후 어디나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으므로 후일 비트겐슈타인의 지휘에 있던 부대원들은 “찬송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란 별명을 얻었으며,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러 저작에서 종교적인 영향을 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섯 개의 빨간 사과'라는 메모를 통해 실제로 빨간 사과 다섯 개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이런 전제가 필수적이다, 생활 속에서 그 언어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언어의 쓰임새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윤리, 종교에 딸린 기호를 가지고 "논리"에 부합한 연구를 시작한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에 관심했던 논리 분석을 윤리 개념에 접합하면서 전쟁 기간에 발전하게 한 소위 "그림 이론"을 적용하였다. 여기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과 노르웨이에서 은둔 생활한 시기에 한 작업이 "논고"의 바탕이 되었다.

 

 

 

 

 

 

 

 

 

1918년 전쟁이 막바지로 치기를 무렵 비트겐슈타인이 이탈리아 북부의 포병 연대에서 중위로 복무할 때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비드 핀센트의 어머니에게서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거기에는 데이비드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비드의 삼촌 폴에게 찾아가 완성된 논고를 핀센트에게 헌정하였다. 논고는 출판사에 보내졌으나 출판되지 않았다.

 

 

 

 

 

 

 

 

 

 

 

 

 

 

 

 

 

 

 

 

 

언어와 세계의 이런 적극적인 관계를 제기한 철학 개념이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이다, "언어는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에서 규정한 개념으로, 언어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낸다는 뜻이다.

 

 

 

 

 

 

 

 

 

 

 

언어의 가능성에서 세계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했다. <논리-철학 논고>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이다. 초판의 서문은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버트런드 러셀이 썼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 대전 기간 본문을 썼으며 일정량이 모이면 러셀과 무어에게 보냈고 1918년 완성하였다. 초판의 출간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22년에 이루어졌다. 흔히 논고로 줄여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기존의 철학에서 적용하는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논리를 잘못 적용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가 되는 것이다. 1939년 무어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철학 교수직을 사임하자 비트겐슈타인이 후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교수직을 갖게 된 얼마 후 영국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수학기초론에 대한 자신의 기존 견해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에서 논리는 단단한 기호였으며, 그는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 개론에 대해서도 이러한 사고를 기초로 비평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에 이르러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글과 강의를 통해서 과거 자신의 사상을 부정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시작되었는데도 철학 강의나 하는 자신의 처지를 견디기 힘들어하였다고 한다. 1941년 9월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길버트 라일의 형제였던 존 라일 교수에게 요청하여 런던에 있는 가이스 병원에서 봉사하겠노라고 요청하였다. 존 라일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의학 교수였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은 가이스 병원에서 약품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병원의 직원들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자신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간혹 비트겐슈타인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부탁하였고, 자신을 비트겐슈타인 교수님이라 부르지 말고 여느 의사들과 같이 박사님이라 불러 주기를 바랐다.

 

 

 

 

 

 

 

 

 

 

 

 

 

 

 

 

비트겐슈타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함께 재직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와 자신의 그림 이론에 관해 토론하던 가운데 잘못을 깨달았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론에 스라파가 반론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목 부분을 밀어 올렸다. 스라파의 행동은 이탈리아에서 의문이나 조소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제스처였다. 순간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주장했던 언어의 논리학과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언어의 의미는 결코 한 가지로 고착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생각의 전환을 바탕으로 [철학적 탐구]를 집필하였으나 출판하지는 않았다. 철학적 탐구는 비트겐슈타인의 사후에 남겨진 초고를 합하여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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