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5월 18일 러셀은 영국의 총리를 지낸 존 러셀 백작의 손자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3대 러셀 백작 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은 영국의 수리 논리학자, 수학자, 역사가, 사회비평가, 철학자이다. 그는 일생의 여러 부분에서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자유주의자 순으로 자신의 이상을 생각해왔으나, 자신이 이 중 어느 쪽도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일생의 대부분을 잉글랜드에서 보냈으나, 그는 웨일스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자유 무역을 지지했으며, 반제국주의 운동가로도 활약했다. 러셀은 1차 세계대전 때 반전 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이후 아돌프 히틀러, 스탈린주의, 전체주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과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는 핵무장 반대운동에도 열렬히 참가했다. 러셀은 189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칼리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조지 에드워드 무어와 아는 사이가 되었으며, 화이트 헤드에 비밀 동아리 케임브리지 아포슬스를 추천받으며 영향을 받는다.
그는 청교도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앨리스와 사랑에 빠지며,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94년 12월 13일 결혼했다. 그러나 둘은 1901년 함께 자전거를 타다가 러셀이 앨리스에게 자신이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며 파경에 빠진다.
러셀은 앨리스의 어머니가 잔인하게 그를 조종하려고 하였기에 싫어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1921년까지 별거하며 형식적으로만 부부로 남아있다가 이혼했다. 이 기간에 러셀은 오톨린 모렐과 배우 콘스턴스 말 레슨 등 여러 사람과 열애 관계에 빠졌다.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의 기초 원리를 연구하며, 집합론의 기초를 뒤흔드는 러셀의 역설을 발견한다. 1903년 그는 수리논리학에 대한 첫 번째 저작인 [The Principles of Mathematics]를 발간하며, 여기서 수학은 매우 적은 수의 공리에서 유도될 수 있음을 보여 논리주의 주장에 큰 근거를 실어준다. 비트겐슈타인은 곧 그의 박사과정 학생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러셀은 그를 천재이자, 자신의 논리학 후계를 이을 사람으로 평가했다.
1910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그는 강사가 되었고,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공학도였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나게 되었다. 1922년 비트겐슈타인의 대표저작 중 하나인 [논리 철학 논고]를 출판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1918년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1차대전 전쟁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그의 철학적 아이디어를 재해석한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 강의하기도 하였다.
1차 세계대전 중 러셀은 몇 안 되는 반전 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1916년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해고되었고, 100파운드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러셀은 감옥에 가기를 희망하여 이를 내기 거부했으나, 정부에서는 러셀의 책들을 압수해 경매에 부쳐 벌금을 징수하였다.
러셀은 1919년 대학교에서 복직되었으나 1920년 강사직에서 물러났고, 1926년 특강 'Tarn er Lecture'의 강사를 잠시 맡았다. 이후 1944년부터 1949년까지는 선임 연구원(Fellow)으로 활동하였다. 러셀은 처음에는 히틀러를 패배시키는 것보다 전 세계에 걸친 전쟁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아 나치 독일에 대한 재무장을 반대했으나, 아돌프 히틀러가 전 유럽을 장악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영구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보았기에, 1940년에는 시각을 바꾸게 되었다.
1943년 그는 "정치적으로 상대적인 평화주의(Relative Political Pacifism)"를 제창한다. 전쟁은 언제나 거대한 악행이지만, 히틀러의 나치 독일 체제와 같은 특정하고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덜 나쁜 악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수학자로서 출발하여 《수학 원리》를 통해 수리 철학 및 기호 논리학에 공헌하였다. 철학·정치·교육·인생 등에 관한 평론도 있다.
주요 저서로 《수리철학 서설》, 《정신의 분석》, 《서양철학사》, 《권력》 등이 있다. 《러셀 서양철학사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기독교 비평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비롯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44년 귀국하여 모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선임연구원(Fellow)으로서 강의하였다.
1945년 원자폭탄이 발명되자, 그는 수소 폭탄의 발명을 예언하고 핵무기 반대 운동과 함께 세계 평화 운동을 벌였다. 처음에는 대학에서 받은 교육 때문에 헤겔적인 절대정신만을 참된 실재라고 하는 관념적 일원론의 입장에 지지했으나 그것이 수학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이 입장을 버리고 그 반동으로서 이번에는 많은 존재물을 인정하는 다원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철학의 문제들》(1912)에서는 개체와 보편, 감각과 물체를 함께 인정하는 이원론적·플라톤적 실재론의 입장에 지지하였다. 러셀의 철학사상은 흔히 지적되듯이 발전적이며 자주 변하였으나 그 기초가 되어 있는 철학에서의 분석적 방법은 일관되어 있고 이에 의해서 과학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이 방법을 토대로 영국 경험론의 전통 위에 선 인식론을 전개하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러셀은 분석철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선구자적 업적을 이뤘다고 평가받는다. 20세기 초에는 헤겔에 영향받은 이상주의에 반대했고, 30년 뒤에 이는 비엔나에서 논리 실증주의자들에 의해 형이상학 반대를 반복했다. 러셀은 근대 수리 논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은 러셀이 자신의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