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위르겐 하버마스

laura-tiki 2022. 7. 1. 21:44

자기중심이 아닌 상대 중심의 소통을 실천할 때 도움을 주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라는 개념이다. 하버마스는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이성은 인간을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도구적 이성'이라고 말한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와 어우러져 합의하려는 이성은 '의사소통적 이성'이며, 도구적 이성과 엄연히 구분된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사회학자이며 언론인이다.

 

 

 

 

 

 

 

 

 

 

 

 

 

 

 

 

 

 

 

 

 

 

 

 

 

 

 

 

 

 

 

 

그는 파시즘은 좌우에 상관없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뮌스터 대학교 송두율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로도 알려져 있다. 이성적인 관심사를 쫓고 그것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인간의 수용 능력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이성적이고 비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잠재력과 이성, 정치적 해방에 대해 밝혀내는 것이 하버마스의 이론적 체계이다.

 

 

 

 

 

 

 

 

 

 

 

 

 

 

 

 

비판이론 실용주의, 북미 실증주의 분야를 연구한 사회학자로 유명하다. 소통 행위의 이론에서 공공 영역의 개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회 이론의 기초와 인식론을 중심으로 연구하였으며, 진보된 자본주의 사회와 민주주의, 비판적 사회 진화적 맥락, 현대 정치학에 영향을 미쳤다. 상대를 설득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열린 자세로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하고 무엇인가를 함께 만들어 내기 위해 이성을 활용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 이론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상호이해에 공통 관심을 품고 있는 시민들이 대등한 눈높이에서 토의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판단이나 견해가 조금씩 변모해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포착했다는 점이다. 논쟁방식을 '숙의'라고 부르고, 이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즉 '숙의 민주주의'의 확립을 제창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장애를 앓고 있었는데, 윗입술이 날 때부터 갈라져 있는 언청이라 그의 발음은 알아듣기가 아주 힘들다. 동리 소년들은 그의 장애를 무시하고 놀림감으로 삼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

 

 

 

 

 

 

 

 

 

 

 

 

 

 

 

 

 

 

 

 

 

하버마스는 언청이라 열성분자로 분류되어 나치 독일 치하에서 히틀러 유겐트 정규반에 들어가지 못하고 응급처치반 하급 요원이 되었다. 하버마스는 덕분에 유겐트 정규 복무를 받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하버마스는 1964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로 돌아와 철학  사회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비판이론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현대 독일의 진보적인 교육자이자 언론인으로 알려졌으며, 1956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사회연구소에 아도르노의 조교로 들어가면서 비판 이론에 입문했다. 강사와 교수로 출강하면서 본 대학교 대학원 과정을 밟으면서 사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마스는 돌연 교수직을 던져 버리고, 슈타른베르크(Starnberg)의 막스 플랑크 과학기술 세계 생활 조건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대학을 떠난 데에는 1960년대 말부터 격렬해진 서독 내 학생운동 세력과의 갈등이 배경이 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좌우 이념에 상관없이 전체주의적인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의 폭력적인 시위를 마조히즘이라 비난하고, 학생운동을 좌파 파시즘이라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는 이내 극렬한 학생운동권들의 적이 되었고, 부르주아 반동 지성인으로 매도당하는 현실에서 더 이상 대학에 머물며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하버마스는 연구소에 파묻혀 10여년간 오직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했다. 그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은 이후 오랜 세월의 사색과 탐구를 거쳐 탄생했다. 하버마스에 대한 극우 진영의 공격과는 별도로 좌익, 학생운동권 진영의 비판 문제는 곧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좌익, 운동 진영의 편협성이 지적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버마스는 공권력에 대항하는 형태로 등장한 민간의 공공성으로서 먼저 '시민적 공공성'이라고 말했다.

 

 

 

 

 

 

 

 

 

 

 

 

 

 

 

 

 

 

 

하버마스가 제안하는 '공론장'이란, 국가나 경제와는 별개인 다양한 시민 연대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현대 시민의 자발적인 공론장이 형성되길 촉구하고 있다. 시민 연대의 비공식적인 공론장이 국가라는 형식적인 공론장과 연대함으로써 정치적 공공성의 동공화를 막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국 문제에도 관심을 보여 대한민국에서 송두율, 김지하 등 비판적 인사들의 처신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한국 정부의 폭력성과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지적하고 질타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그는 영미 언어 분석 철학의 성과들을 폭넓게 수용해 독일 해석학의 의미 이론에 접맥, ‘화용론적 전회’를 감행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자기 철학을 수립해 나갔다.

 

 

 

 

 

 

 

 

 

 

 

 

 

 

 

 

 

 

 

그는 '의사소통 행위론'과 '논변 이론'을 체계화했고, 이것을 핵심으로 '논변 윤리학'과 '의사소통적 이성'의 합리성 개념 및 그것을 축으로 돌아가는 사회적 공론장의 구도를 제시했다. 또한 하버마스는 1960년대의 실증주의 논쟁을 필두로, 역사가논쟁, 현대-탈현대 논쟁, 독일 통일 논쟁 등 2차 대전 이후 독일 현대사에서 정치와 학문의 방향을 가르는 거의 모든 논쟁에 참여했으며, 이런 활동들은 독일의 민주주의적 정치 문화를 진작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하버마스는 1982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에 복직했다가 1996년에 정년퇴직하여 명예 교수가 되었다. 그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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