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하고 사랑이 흐르는 면에서 ‘세라핌적 박사’(The Seraphic Doctor)로 알려진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를 비롯하여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보나벤투라는 로마 가톨릭의 중세 시대 가장 뛰어난 신학자이자 사상가이며 성인 중 한 사람으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시대인으로 큰 발자취를 남겼다.
보나벤투라는 1234~1235년경에 파리로 유학을 떠나온다. 이때 그는 당대의 저명한 신학자였던 헤일즈의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 1185년경-1245)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시기의 보나벤투라의 이력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먼저 흔히 받아들여지는 견해 중 하나는 1238년 소년 보나벤투라가 어머니의 서약대로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에 입회했고 그 이후로부터 '보나벤투라'로 불리게 되었으며 같은 해에 인문학부를 마쳤다는 것이다.
보나벤투라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의 어린 시절 일화는 그가 이후에 편찬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전기를 통해 전해진다. 이 전기에 따르면 보나벤투라는 태어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심한 중병을 앓았다고 한다.
이에 신앙심이 두터운 보나벤투라의 어머니는 앓고 있는 보나벤투라를 안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 장래에 수도원에 보내겠노라고 서약과 함께 탄원하였고 이에 프란치스코가 응하여 보나벤투라가 씻은 듯이 나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그가 '보나벤투라'라 불리게 된 이유에 대해 이 전기에서 전하는 일화에 덧붙여져 여러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견해를 취한다면 성인 보나벤투라의 놀라운 지적 능력과 비범한 학습 능력을 강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견해는 당시 파리 대학교 인문학부의 학제(6년 과정)를 염두에 둘 때 역사적, 사실적인 차원에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이에 따라 많은 학자는 보나벤투라가 1242년에 인문학부를 마쳤으며 1243년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는 견해를 더 많이 지지하고 있다.
프란치스코가 앓고 있는 보나벤투라를 보자마자 "잘 왔노라(bona Ventura)"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는 전설과 그가 병이 나았다는 전언을 듣고 "좋은 소식이로다(bona Ventura)"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흔히 이와 같은 전설들을 통해 그와 프란치스코 성인과의 전혀 평범치 않은 인연을 강조하곤 한다.
한편 전기문에 등장하는 일화에서 보나벤투라의 어머니가 탄원할 당시의 프란치스코가 생전의 프란치스코였는지 아니면 당시 바뇨 레지오 지방에서 많은 사람의 경배를 받았던 사후의 프란치스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보나벤투라의 어린 시절에 대해 전해지는 전설과 기록이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많은 학자는 보나벤투라가 1242년에 인문학부를 마쳤으며 1243년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는 견해를 더 많이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보나벤투라가 정확히 언제 인문학부를 마쳤으며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는지에 대해서 연대를 확정할 만한 결정적인 기록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연대 확정의 문제와는 달리 보나벤투라가 로마 관구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오르비에토(Orvieto)가 아닌 파리에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고 대학 과정의 수련을 받았다는 것은 오늘날 거의 확실한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보나벤투라의 동료인 프란치스코회의 요크의 토마스가, 그리고 세 번째로 보나벤투라가 탁발 수도회의 청빈과 생활 방식을 옹호하는 동시에 기욤의 입장을 철저하게 반박하는 저서들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얻는다.
그 결과 1256년 10월 5일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기욤의 입장을 정죄하게 됨으로써 오랫동안 파리 대학교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문제가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취임이 확정된 지 3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257년 8월 보나벤투라는 도미니크회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파리대학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보나벤투라는 1250년부터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 집 주석에 착수한다. 그는 곧장 파리 대학교의 교수로 취임하지 못한다. 재 속 신학자들과 수도회신학자들 간의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파리 대학교에서 재속신학자와 수도회 간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갈등은 보나벤투라가 신학 강의 자격을 얻어 교수로 막 취임하려던 찰나에 생따무르의 기욤(Guillaume de St. Amour)이라는 인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교수로 취임했지만, 보나벤투라는 파리 대학교에서 교수로서 오랫동안 가르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교수로 취임하기 전인 1257년 2월 2일에 이미 그의 높은 학식과 성덕을 인정받아 프란치스코회 제7대 총장으로 뽑혔기 때문이다.
적게는 30대 후반, 기껏해야 40대 초반에 지나지 않던 다소 젊은 나이에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던 신생 수도회의 총장으로서 취임한 보나벤투라가 맞닥뜨려야 했던 상황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프란치스코회의 제2의 창설자로서 보나벤투라가 남긴 주목할 만한 업적 중 하나는 프란치스코의 전기이다.
그 당시 수도회 창립자 프란치스코에 대해서는 이미 첼라노의 토마스(Tommaso da Celano)가 남긴 3편과 스파이 어의 율리아누스(Julian us Von Speyer 혹은 Julian us Teutonic us)가 남긴 한편의 전기문들 그리고 세 동료전기, 페루자 전기, 익명의 페루자 전기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기의 내용은 프란치스코회의 초창기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의 변화한 정황 및 한층 더 성장한 프란치스코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고 생각한 보나벤투라는 1260년 나르보나 총회의 위촉을 받아 기존의 전기문 및 민담과 전설들은 물론 성 프란치스코가 출생 및 선종, 그리고 활동했던 장소들을 실제로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한 후 예의 달필을 휘둘러 오늘날 [레겐다 마요르]라 불리는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를 완성한다.
새 전기문은 1266년 프란치스코회 총회에서 공인되어 모든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이 새 전기문의 사본을 최소한 한권 이상을 보유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프란치스코회 총회는 보나벤투라의 새로운 전기문 외에 이전에 편찬된 모든 전기문을 폐기하기로 결정한다.
이와 같은 조치는 프란치스코회 내부에서 프란치스코의 생애 및 그의 청빈을 둘러싼 논란을 종식해 종단 내의 갈등을 해소하는 동시에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나가는 젊고 개혁적인 종단으로서의 프란치스코회의 미래를 설계했던 총장 보나벤투라의 노력을 반영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편찬된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는 이제 700여년의 세월과 프란치스코회라는 수도원을 넘어서 오늘날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수많은 독자에게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름다운 삶을 전해주고 있다.